형형색색의 아름다움
세상은 다양한 색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은 바라보면 '파란색'이라는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마린블루, 시안, 인디고, 스카이 블루'등 정말 다양한 색채들로 표현될 수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하늘에 고정되어 있는 시야를 조금만 내려도 얼마나 다양한 색채들이 우리르 감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적' 색채들의 다양성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때로는 아름다움을 통해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고적' 색채들의 다양성은 어떨까?
최근 다양한 시각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책을 읽는 이유 또한 내가 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시각을 알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통해 더 다양한 색채들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항이 아닌 바닷속을 헤엄치며 바닷속 형형색색의 산호들을 발견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색을 경험하게 해 준다.
최근 오랜만에 찾아간 독서 모임에서 '멋진 신세계'라는 책을 읽었다. 이 또한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을 고전문학이다.(개인적으로 문학을 안 좋아한다.) 대학생시절 도저히 이해가지 않는 '파우스트'를 읽으며 다시는 고전 문학을 읽지 않겠다고 했지만 독서모임으로 이를 접하게 됐다. 1931년에 썼던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내용들을 보면서 지금의 사회와 많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있을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걸까?
멋진 신세계에서 세상은 2가지 집단으로 나뉜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가치관과 유사한 '존' 그리고 부모라는 개념이 없는 존재에서 시스템에 의해 사람이 만들어지며 사회가 우선시 되어 통제하에 살아가는 '포드',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틀릴 수 있을까? 나에게는 맞다고 한 일이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도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책에서는 극단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가치관'으로 인한 갈등은 종교, 정치, 이념으로 인해 싸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스스로 자유롭다고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어쩌면 본인의 신념을 가지고 굳건히 지켜나가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그것들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다른 형태의 폭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가? 우리는 사회적 세뇌를 피해 갔는가?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우리는 가족들로부터 그리고 가까운 구성원들로부터 세뇌이자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 안에서도 정말 다양한 색채들이 존재한다. 그럼 이렇게 다른 시각을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야 할까? 그저 멋진 신세계에 나온 것처럼 두 개의 집단으로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게 맞을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사고적 벽에 부딪히면 포기하는 게 맞을까?
색에는 기본색이 있다. 삼원색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보는 다양한 색채들은 기본색을 기준으로 섞이고 농도를 조절하며 사람 눈으로 구별하지 못하는 수많은 색채들로 변화해 간다. 서로가 다른 색들의 농도를 조절함으로써 수많은 가능성의 색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렇게 발전해 왔고 그렇게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다.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고, 그것을 서로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커져서도 안 되고 서로의 입을 막아서도 안 된다.
깊이 들어가면 도저히 끝이 안 나는 문제들이 있다. 어느 것을 맞다고 할 수 있는가? 맞다고 표현하는 게 자만의 결과이지는 않을까? 어떤 것이 도의적인 것이고 어떤 것은 아닌가? 이는 시대별로 달라지지 않았는가?
스스로 답을 찾는 데는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 뻔하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 해야 할 태도는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회피와 포기는 편하겠지만 결국 해결되지 않고 돌아올 숙제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살면서 마주할 사회라면 적어도 조용한 단절보다는 시끄러운 대화가 낫다.
오늘도 다양한 색채들로 세상을 채우는 개복치들이 되기를 바라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