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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un 23. 2024

조선 팔도를 뒤흔든 최초의 정사(情死) 사건

(7)강명화, 장병천

아리시마 타케오와 하타노 아키코가 세상을 떠난 1923년은 가히 '정사(情死)의 해'라고 부를 만했습니다. 이들이 6월에 세상을 떠난 후 일본인의 자살이 네 번 일어났는데, 그 중 두 건이 동반자살이었습니다. 조선인의 경우 박수덕-박창복이나 10대 커플이었던 김용인-문자별이 있었고, 임정측-김도향의 정사 미수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성을 넘어 전국 팔도를 뜨겁게 달군 최초의 정사(情死) 사건은 강명화-장병천 커플이었습니다. 강명화가 1923년 6월 11일에 세상을 떠난 후, 장병천이 10월 29일에 뒤따랐지요.


1923년 6월 10일 밤 11시 경, 강명화는 곁에 있는 장병천 몰래 쥐약을 먹었습니다. 약을 먹은 뒤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고, 새로 장만한 저고리를 가지런히 입은 뒤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왜 이 시간까지 자고 있지 않냐고 묻는 장병천에게, 강명화는 이미 독약을 먹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지고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죠. 장병천은 급히 의사를 부르고 서울에 있는 장모에게 전보를 쳤지만, 의사는 이미 몸 속 깊이 약이 스며들었기에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1일 오후 6시 경, 강명화는 고통으로 몸을 뒤척이다가 장병천의 곁에 드러누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장병천이 강명화의 몸을 흔들며 오열했습니다. 그러자 강명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상 사람 중에 제일 사랑하는 파건...."


'파건'은 장병천의 별호로, 그녀는 죽기 전까지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되뇌였습니다. 이렇게 강명화는 스물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죠. 그러면 강명화는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요? 이후 장병천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강명화는 1901년 6월 12일, 강기덕과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실 '명화'는 기명(妓名)이고 어릴 때의 이름은 '확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금광과 노름에 미쳐 일을 하지 않았기에, 살림살이와 생계를 꾸리는 것은 어머니 윤씨 몫이었습니다. 윤씨는 어릴 적 의붓외조부에 의해 강제로 강기덕에게 팔려와 결혼했었습니다. 윤씨는 딸이 자신처럼 가난한 농부에게 팔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베필을 맞이해줄 여력이 없었기에, 딸을 평양 기생의 수양딸로 팔았습니다. 확실이는 기안(妓案)에 입적하고, 10여년 간 기생 생활을 한 뒤 좀 더 큰 곳에서 활약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사했습니다. 이때, 대정권번에 들어간 확실이는 '명화'라는 기명을 얻게 되었죠. 권번에서 창가, 무용, 시조, 서화 등을 다양하게 배운 명화는 어느새 기생으로서, 미모와 실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백만장자부터 시작해, 김동인, 나도향, 현진건 등 문학책에서 이름 한 번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문인들도 그녀를 찾았죠. 그 덕에 명화는 쉴 틈 없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명화는 어느새 수천원을 모았고, 서울에 번듯한 집 한 채를 마련할 정도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명화는 남몰래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들처럼 번듯한 남자를 만나 백년해로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무리 돈 많은 남자가 와도 명화의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20년 여름, 강명화는 운명적 상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명화는 한강 인도교 난간에 기대어 연인들을 바라보고 있었죠. '나도 저렇게 살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하면서요. 양복을 입고 둥근 뿔테 안경을 쓴 젊은 남성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요. 그 남자는 바로 영남 갑부 장길상의 아들 장병천이었습니다. 여름에 도쿄로 가기 전, 송별회를 하려고 경성에 들른 참이었죠. 


장길상은 소작인에게 가혹한 소작료를 물리는 악덕 지주였으나, 장병천은 아버지의 성품을 물려 받지 않았습니다. 강명화는 장병천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였고, 법당에 가서 백년해로를 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아버지 몰래 일본행을 포기한 채 도쿄의 학교에 1년 간 휴학하겠다고 친구에게 전달하게 한 뒤, 강명화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강명화는 자신의 굳은 마음을 장길상이 알아줄 것이라며 낙관적으로 생각했지만, 일개 기녀가 천하의 장길상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장길상은 아들이 도쿄 유학을 하지 않고 기생첩과 동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갈갈이 날뛰었습니다. 장길상은 아들의 생활비와 학비를 끊고 집으로 불러들였고, 강명화는 억만장자의 아들을 홀린 요부로 낙인찍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 속에서도 장병천은 강명화를 계속 만났습니다. 1922년 봄, 두 사람이 만난지 3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강명화는 권번에 나가기 위해 치장을 하다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내가 이렇게 살 동안 나리의 마음이 변하면 어찌하냐고 하소연했습니다. 장병천은 아버지의 마음만 돌리면 된다고, 내 마음은 변할 리가 있냐고, 오히려 네가 새서방 만나 정을 틀까 봐 걱정이라고 농담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강명화의 얼굴이 굳더니 나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겠다며, 가위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습니다. 그녀는 이제 기생 노릇을 할 수 없다고, 다른 남자에게 곱게 보일 수도 없으니 내 마음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뒤 두 사람은 흐느꼈습니다.


강명화가 머리카락을 자른 뒤, 불러주는 곳이 없어 기생 생활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달 안에 곤궁해져 밥 대신 죽으로 떼워야 할 지경이 되었죠. 장병천은 물 구경한다는 핑계로 집에서 빠져나와 강명화에게 도쿄의 음악학교에 유학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기생이 아니라 유학생의 신분이라면, 고지식한 아버지가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병천은 아버지께서 주신 남은 돈으로, 강명화는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된 패물과 경성의 집을 팔아 유학비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도쿄로 가서 장병천은 대학 예비과에 등록하고 강명화는 학교 입학을 위해 영어 공부를 하며 신혼생활을 시작했지만, 도쿄에서의 살림도 험난했습니다. 


장길상은 아들이 도쿄에서도 기생첩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학비와 생활비를 끊어버렸고, 유학생들은 "자기들은 힘들게 노동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저 놈은 아비 잘 만난 덕에 기생첩과 희희낙락한다." "기생 주제에 유망한 청년의 미래를 망치고 여학생인 척한다."라면서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강명화는 자신의 집 앞에서 야유를 퍼붓는 유학생들에게 "우리는 이미 서로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헤어질 수 없다"면서 부엌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습니다. 그러면서 "목이 이 손가락처럼 잘린다고 해도 나리를 떠날 수는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죠. 그러자 유학생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습니다.


강명화의 손가락을 보면서 장병천은 오열했습니다. 하지만 슬픔도 잠시, 다시 유학생들이 그들을 공격하러 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두 사람은 도쿄를 떠나 경성으로 향했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강명화가 장길상을 설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강명화가 장길상의 집으로 들어서자, 바로 문전박대 당하면서 일말에 남은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세간에서는 강명화더러 '일개 기생이 전도유망한 청년의 미래를 망쳤기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강명화 역시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보여주었던 단지, 단발(일본의 신주다테와 비슷한 개념 같아요)은 오히려 그녀에게 '독한 요부'라는 이미지만 심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서는 장병천과 이별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로 결심했죠.


결국 강명화는 앞에서 보다시피 1923년 6월 11일에 쥐약을 먹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세간은 장길상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악덕 지주 장길상에게 내린 벌이라는 소문도 떠돌았죠. 그래서 장길상은 강명화의 장례식만큼은 7대의 자동차를 동원해 성대하게 치러주었습니다. 그리고 14일 밤에는 제문을 지어 친히 빈소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장병천은 다시는 기생집에 가지 않고 학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장병천의 머릿속에서는 강명화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가락을 자르며 사랑을 증명했는데 자신은 대체 뭘 했는지 자책하기도 했죠. 생전 강명화를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분노가 솟구쳤지만 차마 아버지에게 저항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상실감과 무력감으로 점점 초췌해지던 장병천은 1923년 10월 29일 새벽, 강명화가 했던 것처럼 쥐약을 먹었습니다. 가족들이 재빨리 병원으로 이송시켰지만 그는 깨어나지 못하고 오후 2시경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23년 당시의 신문기사                                


강명화와 장병천의 정사(情死) 이후, 두 사람을 소재로 한 소설, 영화 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본인 감독 하야가와는 실제 기생 문명옥을 캐스팅 해 영화 '비련의 곡'을 상영했고, <강명화전>, <강명화 실기> 등의 소설도 출간되었죠. 장길상은 영화 상영을 중단하라고 총독부에 요구했지만 총독부에서는 예술 작품이라는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장길상은 소설 판매도 막기 위해 사재기를 했으나 소설의 인기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죠. 강명화와 장병천의 일화는 경성을 넘어 시골 농촌에서까지 이야기로 오르락내리락할 정도였습니다.


"조선여자로서 진정의 사랑을 할 줄 알고 줄 줄 아는 자는 기생계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나혜석
"자살귀 강명화가 열녀가 되는 게 무슨 예술이냐."
-신채호


나혜석은 '자유연애'의 주체가 기생이었다고 하면서, 강명화의 죽음을 치켜세웠습니다. 반면 신채호는 강명화의 죽음은 구시대적인 관습에 불과하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명화-장병천의 죽음이 자유연애와 정사를 자극한 것은 확실합니다. 영어의 'love'를 '연애(戀愛)'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일본이었는데(모리 오가이가 살던 메이지 시대로 추정합니다), 이 말이 조선에 수입된 것은 강명화가 죽었을 때였으니까요.


정사(情事)는 일본의 신주(心中)가 수입된 문화입니다. 강명화-장병천 전에도 자살하는 커플은 많았지만, 그들의 죽음을 시작으로 기생들의 모방 자살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기생의 특성상 외간 남자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기에 연애도 다른 여성에 비하면 자유롭게 할 수 있었죠. 하지만 기생에 대한 세간의 시선과 중매 결혼이 일상이었던 시대에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정사를 택했고, 이후 정사 문화는 신여성 계층으로 확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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