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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un 16. 2024

조선인의 정사(情死)에 신호탄을 준 일본의 신주(心中)

(6)아리시마 다케오, 하타노 아키코

*또 다른 일본 문인 아리시마 다케오의 이야기를 먼저 씁니다. 강명화, 장병천 편은 다음 주로 미룹니다.


1923년, 어떤 일본인이 남긴 유서를 동아일보가 인용했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꼭 사뢰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죽음이 외계의 압박을 못 이김이 아닌 것이올시다. 저희들은 '자유'에 기쁨을 참지 못하여 죽음을 맞습니다.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우리는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3.9.30에서


우리가 죽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니, 죽을 때 즐겁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는 일본의 작가 아리시마 다케오가 남긴 유서로, 그는 연인이었던 하타노 아키코와 동반자살을 했습니다. 이들의 죽음 이후 『동아일보』에서는 4건의 모방한 일본인 동반자살을 보도하는데, 그 중 두 건이 남녀가 함께 한 동반자살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신주(心中)는 조선으로 수입됩니다. 아리시마-하타노와 비슷한 무렵에 죽은 기생 출신 강명화와 부호의 아들 장병천이 대표적입니다. 그 외 1923년에 죽은 연인에는 17살의 소녀 박수덕과 22살의 청년 박창복이 있었고, 19살의 김용인, 17살의 문자별 같은 10대 연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3년 뒤 윤심덕-김우진 같이 '사의 찬미'로 유명한 연인들도 정사(情死)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면, 아리시마 다케오와 하타노 아키코는 어떻게 만났으며 왜 동반자살을 시도했을까요?


아리시마 다케오(1878~1923)



1878년, 아리시마 다케오는 전(前) 대장성 관료였다가 부유한 사업가로 변신한 아리시마 다케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리시마는 부유한 집안에서 가쿠슈인이라는 명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다가, 왕세자였던 요시히토(훗날 다이쇼 천황)의 소꿉친구가 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부잣집 도련님'으로서 풍요롭게 살았지만, 부모님은 그를 '엘리트 자제의 아들'로 키운다는 명목으로 가혹하게 훈육했고, 아리시마는 살벌한 집안에서 탈출하기를 갈망했습니다(다자이 오사무 역시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엄격한 집안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여인들에게 사랑을 갈구했었죠. 아리시마는 어떻게 자랄까요?).


아리시마는 결국 삿포로농학교로 향했는데, 의외로 아버지는 순순히 허락했습니다. 왜냐하면 삿포로농학교에 아버지와 친한 교수가 있었고, 그 교수 밑에서 아리시마가 딴 짓하지 않고 잘 자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과목이 가장 좋냐고 묻는 지도 교수 앞에서, 아리시마는 '문학과 역사'라고 대답했습니다. 농학교 교수 입장에서는 의외의 답이 나와 놀랐지요. 이때부터 아리시마는 작가의 꿈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1909년에 육군 소장의 딸 카미오 야스코와 결혼한 뒤, 1910년  『시라카바(白樺)』  동인지 창간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916년, 야스코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리시마와 세 아이를 남긴 채로 말이지요. 아리시마는 이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내 어린 것들에게>라는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그 작품에는 야스코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슬픔이 묻어나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죽음을 알게 하는 일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다. 장례식 때는 하녀를 아이들에게 붙여 주어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해 달라.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은 세상을 비추는 햇빛처럼 크다.


야스코는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긴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신슈에 있는 산에서 노느라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리시마는 이때의 기억을 한스러워하면서도, 아내의 행동을 가치 있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생전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않고, 충실히 가정을 지켰던 아리시마는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기 아내를 희생시키기로 결심한 작품, <실험실>을 썼습니다. 병의 진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내의 시체를 해부하는 내용이지요. 그리고 결혼 전에 썼던 작품을 개고해서 <어떤 여자>라는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요코와 쿠라치의 사랑이야기이지만, 쿠라치의 아내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 그녀는 쿠라치와의 육체적인 관계만을 중시하다가 피폐해지는 내용입니다. 


불륜을 저질렀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1910~20년대에는 불륜이란 개념이 없었습니다. 후대 문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다자이 오사무 모두 정실 부인이 있는 상황에서, 신주(心中)를 했지요. 작가는 사랑 없는 육체적 관계를 비판한 것일수도 있지만, 육체적 관계의 계기가 요코가 사랑을 나누던 쿠라치의 아내에게 질투심을 느끼면서 시작된 것이니 불륜을 비판적으로 본 것일수도 있겠습니다(하지만 아래글을 읽어보시면 아리시마 역시 불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애초, 정사(情死)라는 것이 구시대의 결혼 관습과 신시대의 연애 관습이 충돌해서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아리시마의 연애관은 1920년 6월 5일에 발행된 <아낌없이 사랑은 빼앗는다>에서 드러납니다.


육체관계까지 가도 후회와 미움을 일으키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다.
사랑은 사람에게 나타난 순수한 본능의 작용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 항상 가족을 이루자.


'연애란 성욕이 시적 표현을 받은 것'과 같다는 아쿠타가와에 비하면, 아리시마가 사랑을 좀 더 미화하고 긍정적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문구처럼, 아리시마는 대놓고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1920년대만 해도 조선과 일본 모두, 중매나 정략 결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을 보면, 시대를 앞서간 발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리 오가이가 사랑하는 연인을 버리고 체념 상태에 머무르고, 아쿠타가와가 신주에 실패하고, 후대 문인인 다자이가 결혼한 와중에도 내연녀와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한 것에 비하면 말이죠. 


사랑하는 자의 죽음만큼 편안하고 결백한 죽음은 없다.
현재의 문화는 남성이 만들었다. 문화를 재검토해 줄 여성의 출현을 바란다.


아리시마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 동반자살을 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아내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자신의 연애관을 정리해 작품을 창작하고 있었을 무렵, 두 번째 문구처럼 그의 문화를 재검토해줄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하타노 아키코로, 그녀와의 만남으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게 됩니다.


하타노 아키코(1894~1923)


하타노는 잡지 <부인공론>의 기자로, 신여성이었습니다. '빈사의 백조'라는 공연을 함께 보면서 두 사람은 눈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하타노가 아리시마에게 구애 편지를 보내면서, 그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하타노와의 연애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하타노가 유부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하타노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오야마 여학교를 다니던 시절, 15살의 연상인 하타노 하루후사를 만났고 그녀는 아버지같은 남자에게 반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유부남이었던 하루후사에게 아내와 이혼하라고 종용했고, 결국 하루후사는 아내와 이혼한 뒤 아키코와 재혼했습니다. 그런데 아키코는 원하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랑을 받기보다 새장 속의 새처럼 고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인의 먹을 것만 기다리는 새처럼 하루하루 지루하게 살던 와중, 하타노는 아리시마를 만나면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떴고, 아리시마 역시 똑똑하고 지적인 미인이었던 하타노와 열렬히 연애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루후사는 아리시마에게 1만 엔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두 사람을 간통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면서요. 아리시마는 사랑하는 사람을 돈 주고 넘길 수 없다면서 거절했습니다. 차라리 감옥을 가겠다고 결심했죠. 그리고 아리시마는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결혼하는 것, 즉 자유연애와 결혼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리시마는 하타노를 사랑하고, 그녀와 함께 감옥에 갈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1923년 6월 4일, 두 사람은 치바 후나바시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5일 뒤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의 학자와 교수, 그리고 젊은 작가 또는 소시민적인 여급․예자(芸者)등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박종화
완전한 승리자의 죽음
-로성
특별한 예술적 인생관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에게)어떠한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
-김창제
연애를 위한 연애, 비인격적 야비한 연애
-안화산


아리시마 다케오와 하타노 아키코의 죽음은 일제의 치하에 있던 조선에서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박종화와 로성은 그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김창제와 안화산은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어떤 말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신호탄으로 조선의 연인들이 정사(情死)를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아리시마와 하타노가 죽을 무렵, 세상을 떠나는 조선인 연인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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