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밤, 날아다니는 공포
1. 전쟁의 서막
앞선 편에서 언급했듯, 태국에서 장기여행을 하거나 삶을 고민한다면 피할 수 없는 것이 바퀴벌레 문제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출몰하기 시작한다. 특히 사람이 많고 길거리 음식이 많은 곳에는 덩치가 크고 날아다니기까지 하는 바퀴벌레들이 득실거린다.
처음 바퀴벌레를 마주한 건 파타야의 한 리조트 침대 옆이었고(다행히 이후 마주치지 않았다), 가장 큰 충격은 카오산로드에서 숙박할 때였다. ‘여행자의 거리’라 불리는 카오산로드에는 새벽까지 먹고 마시며 노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음식 쓰레기가 밤새 넘쳐나고, 강한 햇볕과 스콜에 노출되면 악취와 오수가 골목마다 진동한다. 그곳에선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가 날아다니며 사람들 사이를 유영한다.
2. 날아다니는 공포
어느 날, 길을 걷다 웅-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손바닥 반만 한 바퀴벌레가 앞의 아저씨 어깨에 착지했다. 숨이 멎는 듯 짧은 비명이 목구멍에서 끊겼고, 손짓으로 아저씨에게 알려주자 그는 씨익 웃고 대화를 이어갔다. 바퀴벌레가 내 어깨에 날아왔다면 그 자리에서 울며 기절했을지도 모르는데, 그저 웃으며 넘기는 그의 반응이 충격이었다.
며칠 뒤 친구와 길거리 헤나샵에서 문신을 받던 날, 발밑으로 기어 다니는 거대한 바퀴벌레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과 음악에 무뎌져 있던 시야가 한 번 트이니 온 거리가 바퀴로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마르길 기다리던 헤나는 땀에 번졌고, 바퀴벌레를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날 이후 친구의 등에 번진 헤나는 한국에 돌아와서까지 우리에게 태국의 밤을 기억하게 해주는 웃지못할 ‘흉터’가 되었다.
2.인간은 적응의 동물
몇 차례 호텔에서 한달살기를 하다가, 태국에서 알게 된 친구 소개로 현지 콘도를 한 달 단위로 빌려 살기 시작했다. 시장이 가깝고 번화하지 않은 동네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숨 쉬며, 매일 거리를 걷고, 시장을 구경하고, 친구들과 쇼핑몰과 사원을 다녔다
그곳에서 만난 현지 친구 덕분에 동네의 맛집들을 알게 되었고, 특히 콘도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팟타이 가게를 무척 좋아했다.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푸짐하게 내어주는 팟타이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해줬다. 문제는 저녁이면 그 가게에 덩치 큰 바퀴벌레들이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머리 위로 윙윙 날아다니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공포보다 팟타이의 맛이 더 자극적이었다.
한 번은 친한 동생과 함께 태국 한달살기를 하게 되었다. 방콕에 머무는 동안 그 가게에 데려갔는데, 쌀국수를 첫입 먹자마자 동생은 소리를 지르며 맥주잔을 엎었다. 어디선가 바퀴벌레가 날아와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허리 숙이고 음식 가려!”
다급하게 외친 나는 한 손으로 팟타이를 보호하며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동생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따라했지만, 발밑을 스치는 검은 그림자에 다시 비명을 질렀다. 결국 우리는 두 발까지 들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은 뒤에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 동생은 ‘태국 여행’만 들어도, 팟타이를 먹던 그날의 공포와 긴박함을 회상하며 열변을 토한다. 그 자리에서 태연하게 국수를 먹던 나의 모습이 가장 낯설었다고도 했다.
3.그래도, 끝나지 않는 전쟁
사실 태국의 삶에서 바퀴벌레와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콘도를 새로 계약할 때마다 바퀴벌레 흔적을 찾아다니고, 잘못 계약하면 수개월을 잠 못 이루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적응되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문화적 차이에 과하게 호들갑 떨지 않게 된 건 분명 발전이다.
물론,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팟타이를 먹기 위해 허리 숙여 젓가락질을 하던 그날처럼,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고 느끼며 이곳에서 살아간다. 조금 더 예전보다는 유연하고 능청스럽게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