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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나 Apr 10. 2021

육아휴직 중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임신 후 17kg이나 퉁퉁 불어버린 몸으로 뒤뚱거리며 2주쯤 기다린 끝에, 심쿵이가 우리 곁으로 왔다.


사실 아가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매 순간 나와 함께였던 것이 맞지만, 임신 중에는 그 사실이 실감 나게 실감 나지 않아 아이러니하게도 심쿵이가 내 몸과 분리되고 나서야, 그제야 우리가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비로소 와 닿았다.




백일 정도를 앓았고, 그쯤 지나고 나서야 몸이 좀 나아져 하루하루 아기를 키워냈다.


밤에 잘 때 크는지, 낮에 놀 때 크는지, 매일 눈 뗄 틈 없이 아기를 지켜보는 나날들 중 대체 어느 순간에 몸무게가 늘고 키가 자라고 윤곽이 또렷해지는 건지 알아챌 수가 없어 어느 날 문득 아기가 훅 큰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글자 그대로 내 피와 살로 만들어지는 젖을 수도 없이 먹이고, 기저귀를 셀 수 없이 갈고, 씻기고, 재우고, 놀아주고, 지켜보고, 요리라고는 취미도 소질도 없는 주제에 이유식은 기어코 만들어 먹이는 일을 매일매일 끝도 없이 하면서, 쿨하게 ‘낳아 놓으면 아기가 알아서 크더라’라는 식의 말은 도저히 못 하겠더라.


그건 일단 아예 전혀 말이 안 되는 말, 어불성설, 앞뒤가 안 맞아 할 필요 조차 없는 말이고, 이 세상 모든 양육자들에 대한 예의 또한 아니다.


(그 세상 예의 없는 인간이 바로 나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으로 키워준 엄마에게 나는 메-롱 하며 혀를 내미는 것 정도와 비슷한 느낌으로 ‘난 혼자 알아서 컸는데?’라며 장난을 치곤 했었다. 차라리 메롱을 하지 그랬어.)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듯 지내다 보니 벌써 아기는 만 8개월 반을 지나가고 있었고, 그 말인즉슨 회사 복귀까지 3개월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1년 중 9개월을 사용하여 총 1년을 쉬는 스케줄인지라,


(이 ‘쉰다’는 표현이 종종 거슬린다. 회사 일을 잠시 중지(pause)한다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인데, 이를 휴식을 취한다(rest)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아 오해의 소지가 높다.


이 오해는 때때로 오해받는 이를 빈정 상하게 하는데, 분명 오해했으면서 ‘아닌데? 나 그런 뜻 아닌데?’라고 말하기가 참 쉬운 종류의 것이다 보니 오해받아 빈정 상한 사람만 괜히 예민하게 구는 것으로 치부되기 쉬운, 그래서 더 짜증스러운 종류의 오해라서 더 빈정이 상한다.)




암튼 내게 주어진 시간 고작 그 1년으로는, 아기가 걸음마를 겨우 할까 말까 하도록 키워내는 것 정도가 내가 그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 맞는데, 복직만 생각하면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답답하고 휑-했다. 난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매일 아기만 보느라 내 몸도 마음도 챙길 여유가 없어 아직도 난 출산 후 회복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너덜너덜 흐믈흐믈해진 것 같은데, 이대로 다시 회사에 복귀하면 과연 내가 온전한 심신으로 일을 할 수가 있을까?


난 너무 지쳐서 체력도 정신력도 남아 있지가 않은데 어쩌나, 하는 걱정이 나를 채웠다.




나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새 존재를 품에 안고 행복에 겨운 날들을 보내면서, 나는 왜 순간 멍해지고 때때로 공허해하는 걸까?


사실 나는 걱정했던 것보다 정말로 훨씬 더 잘하고 있고, 매일 웃고 떠들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도 같은데, 이따금씩 훅 하고 올라오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는 뭘까? 그저 흔하디 흔하고 당연하디 당연한 인간의 근원적 고독 같은 류일까?


어쩌면 그저 별 일 아닐까? 그냥 엄마랑 사소한 수다 한 통이면 말끔히 다 괜찮아졌을 하루 끝 감정 조각일 뿐인 걸까?



내밀한 감정, 자잘한 느낌까지 필터링 없이 다 털어놓던 이가 없어 언젠가부터 내 마음은 묵직하게 엉킨 빨래더미처럼 젖어 마르지 못했다.


그래서 써보기로 했다.


엄마를 보내고 엄마가 되어,

닿을 곳을 잃은 내 안의 말들을 글자로 꺼내어 보기로.


쌓이는 말들을 하나 둘 뱉어내다 보면, 내게 볕이 되어 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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