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니는 동안 내 아침은 늘 사무실에 도착해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
2주 전부터 출근하지 않으면서, 처음엔 여전히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했지만 일주일 만에 토스트와 과일까지 챙겨 먹게 되었다.
요즘의 오전 루틴은 6시 20분 기상, gym에서 '천국의 계단' 20분, 집에 와서 샤워, 8시에 아침 식사, 9시부터 본격 근무 시작으로 이어진다.
퇴사를 하게 된 이유는 내 브랜드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기 위함이지만, 이를 위해선 자금이 필요했다. 현재는 아이디어와 디자인만 나온 상태고 구체적인 계획은 정해지지 않았음으로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것들이 준비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몇년 전 설립해서 조금씩 수익을 내고 있던 내 법인을 활용해 지속적으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0월 초에 사직서를 내고 이곳저곳에 사업한다고 떠들고 다닌 덕에, 주변에서 도움이 될 만한 업체와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퇴사하자마자 부지런히 웹사이트와 명함, 회사 소개서를 만들었고 소개받은 업체에 제안서를 보내고 미팅도 가졌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세 곳의 업체에서 거래처로 등록해 주었는데...
맙소사. 한 업체의 발주 금액이 너무 컸다. 대기업이라도 첫 주문은 소량으로 품질을 확인한 뒤 추가 주문을 할 거라고 들었는데, 이야기했던 수량보다 5배나 많아진 것이다.
4억 원이 넘는 첫 주문.
문제는, 주문이 들어오면
1. 내 회사에서 제조사에 돈을 지불하고
2. 물건을 생산한 뒤
3. 생산 완료된 제품을 기업에 납품하고
4. 기업에서 내 회사에 돈을 지불하는 순서인데,
네 번째, 즉 구매업체가 내 회사에 돈을 주는 정산 주기가 60일 뒤라는 사실이다.
그동안 법인 통장에 모아둔 자금과 회사에서 받았던 인센티브를 달러로 바꿔놓았던 달러 통장, 내년 3월 만기 적금, 중간에 이미 한 번 정산받아 얼마 안 되는 나의 작고 소중한 퇴직금, 지난달 급여까지 모두 모아도 약 4천만 원이 모자랐다.
제조업체 사장님께 50%는 미리 정산하고 구매업체에서 돈이 들어오면 나머지 50%를 결제해도 되는지 조심스레 여쭈었지만, 첫 거래라 어렵다고 하셨다. 당연한 일이다. 처음 거래하는 업체를 신뢰할 만한 근거가 부족할 테니까.
설상가상으로 남은 두 곳에서도 동시에 발주가 들어왔는데, 한 곳은 정산 주기가 익월 말일(예: 11월 5일 납품 시 12월 31일 정산), 다른 한 곳은 30일이었다.
추가된 두 업체의 주문까지 합하면 내가 당장 필요한 자금이 4천만 원에서 7천만 원으로 늘었다.
7천만 원을 대출로 마련할지 고민하던 중, 첫 발주 기업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은행에서 전자결제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자세히 묻자, 구매기업이 발행한 세금계산서 금액으로 은행에서 내 회사에 미리 대금을 지급하고, 60일 뒤엔 은행이 구매기업에서 직접 돈을 받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현금이 부족한 사업자에게는 정말 고마운 제도였다.
전자방식 외담대를 위해 필요한 조건과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데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시간이 되면 얼굴을 보자는...
그 친구는 전 남편이 런던에서 석사 과정을 하면서 알게 된 같은학교 후배였고, 나와 동갑이라 친구처럼 지냈다.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 한 기업에 취직을 했다가 몇 년 뒤 사업을 시작했고, 프랑스 유명 기업과 독점계약을 맺으며 현재는 98개국에 수출 중인 소위 성공한 사업가이다. 한국에는 1년에 두 달도 머무르지 못하는 너무 바쁜...
그래서 매년 초 서로 CES 참석차 라스베이거스에 갔을 때 잠시 만나서 얼굴 볼 수 있었고, 연말 즈음 한국에서 한 번씩 만날 수 있는, 많아야 1년에 두 번 보는 친구가 되었다.
나는 이제 퇴사해 내년부터는 CES에 참석 할 일도 없으니, 이번에 만나지 않으면 다음 만남은 또 내년 이맘때가 될 것 같아 하던 일을 멈추고 나갔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SNS로 서로의 소식을 확인하고 카톡도 가끔 하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어떻게 지내는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참치회에 사케를 곁들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S야.. 너는 왜 결혼 안 하니?"
"이렇게 바쁜데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냐..."
"결혼해서 같이 해외 다니는 것도 좋지 않아?"
"여행도 아니고 출장을 같이 다니는 건 아니지."
"하긴... 나도 그건 조금 싫겠다."
"너는 누구 안 만나? 회사에서 고백하는 사람 없었어?"
"나 이혼한 거 회사에 아무도 몰라. 퇴사하면서 회식 자리에서도 말 안 하고 나왔어."
"계속 혼자 살 거야? OO이 유학 가면 외롭잖아."
"혼자가 너무 좋아. 누굴 만나는 것도 감정 소모로 느껴지고... 사실 남자는 믿지 않아."
"선배한테 정말 큰 상처를 받았구나. 하필 최악의 남자를 만나서..."
"이제는 오히려 고마워. 어설프게 나빴으면 또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텐데, 남자라면 진절머리가 나도록 만들어서 누가 다가올 듯하면 바로 차단하게 돼."
"너 답지 않게 단호하네... 너가 자세히 얘기는 안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선배가 진짜 나쁜놈인건 분명해. "
"난 고맙다니까. 덕분에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 됐어."
"너 계좌번호 OO은행 그대로지?"
"응, 왜?"
"OO이 대학 합격 축하 용돈 좀 보내주려고."
"오~~ 그래, 두둑하게 보내라. 돈 많은 삼촌 노릇 이럴 때 하는 거지."
서로 스무 살 초반에 알게 되어 나이가 들어도 대화는 그 시절에 머문 것 같다며, 매년 비슷한 얘기만 하다가 헤어지지 말고 내년에는 좀 발전적인 이야기를 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집에 도착해 쉬고 있을 때 은행 알림이 왔다.
입금 5천만 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야, 뭐야. 무슨 돈이야."
"사업 시작하면 갑자기 필요한데 안 구해져서 꼬이는 경우도 많잖아. 일단 가지고 있어."
"고맙긴 한데... 필요하면 내가 대출 받아서 해결하지."
“투자금이라고 생각해."
"싫어. 나중에 잘되면 그때 투자해."
"잘되면 여기저기서 투자하겠다고 연락올텐데...그럼 내가 생색을 못 내잖아."
"너 맨날 해외 다니면서 잠도 못 자고 버는 돈을 내가 무슨 염치로 받아..."
"나는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외아들이라 형제도 없고, 결혼도 안 해서 가족도 없고..."
"아휴... 또 레퍼토리 나오네."
"사실 몇 년 전 주식이랑 코인을 사뒀는데, 바쁘기도 하고 장기로 둘 생각이라 확인도 안 하고 있다가 지난달 확인했더니 엄청나게 올랐더라. 그래서 수익금 50%는 빼놨는데 쓸 데가 없어서 기부도 좀 하고, W형 사업에도 투자하고... 그러고 있어. 너도 퇴사했다길래 미리 투자하는 거야."
"음... 그런 거라면 투자 말고 그냥 빌려준 걸로 해줘. 내년 1월 23일에 돈 들어오면 그때 갚을게. 사실 돈이 부족했는데 구매기업 담당자가 외담대 방식 알려줘서 해보려 했거든. 그런데 필요한 돈이 다 나올지 몰라서 불안했어. 딱 필요한 때 꼭 필요한 금액이 들어와서... 고맙다. "
"응. 그럼 빌려주는 걸로. 이자는 오마카세+돔페리뇽으로 갚아."
"그래. 잘 쓰고 잘 갚을게. 너무 고마워"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실 친구가 보내준 돈은 그에게도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다. 그는 자기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이 아니고, 투자할 때도 신중하다는 걸 안다.
그런 그가 아무런 계약서도, 담보도 없이 5천만 원을 보낸 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믿어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실하게 살면 누군가는 보고 있다'는 말을 진부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진부한 말이 진실이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악착같이 회사 다니면서도 맡은 일은 제대로 끝내려 했고, 사람들과의 약속도 지키려 애썼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 방식대로 살았을 뿐인데, 그게 쌓여서 누군가의 신뢰가 됐다.
내일 아침에도 6시 20분에 일어나서, 헬스장 가서 땀 흘리고, 집에 와서 토스트를 먹고, 9시에 책상 앞에 앉을 것이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오늘도 내일도, 내 방식대로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갚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