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딸인 나에게 어렸을 때부터 불필요한 말까지 다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아빠의 험담부터 친가, 외가 쪽 어른들만 알아야 할 이야기 “어떤 숙모는 사실 재혼이야”, “어떤 삼촌은 대학 시절에 자살 시도를 했었어” 같은 내가 전혀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성인이 된 뒤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까지 늘 털어놓았고, 그로 인해 엄마와의 대화는 어느 순간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거짓말로 시작된 분노
"더 이상 나까지 스트레스 주지 말라"며 엄마에게 크게 화를 낸 일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영국에 살 때였다. 어느 새벽, 엄마가 전화를 걸어 위내시경을 했는데 의사가 “며칠 뒤 다시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투가 심상치 않아 암이 의심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멀리 떨어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루하루 초조했고, 밤마다 기도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이주가 지나도 결과는 “아직 모른다.” 였다.
결국 남동생에게 물어보니,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도 없다고 했다. 알고 보니 엄마는 그즈음 내가 당신에게 무심한 것 같아 일부러 걱정시키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늘 안 좋은 꿈을 꿨다며 전화를 걸 때였다.
“너한테 안 좋은 일 생길 것 같아. 꿈에 아기였던 네가 나왔어. 이런 건 진짜 안 좋은 꿈이야”
처음엔 아무렇지 않게 넘겼지만, 몇 번이고 반복되자 어느 날 폭발했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왜 매번 그런 소리로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만들어?! 출근을 하지 마? 회사를 때려치워? 뭐 어떻게 하라고 출근 준비할 때마다 쓸데없이 기분 잡치는 말을 하냐고!!!”
그 이후로 엄마는 나에게 더 이상 거짓말로 관심을 끌려하거나 괜히 전화해서 기분 찝찝한 소리를 전하지 않았다. 이젠 그 대상이 남동생으로 바뀌었을 뿐...
나는 아이에게 비밀 많은 엄마가 되었다.
이런 엄마를 둔 탓일까. 난 아이에게 안 좋은 이야기는 뭐든지 비밀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가 선택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굳이 전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첫 번째 비밀, 이혼사유
2017년 시작한 전남편과의 이혼 소송은 2020년 종결되었다. 마침 아이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라서 곧 사춘기가 올 아이를 더 힘들게 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 전남편은 홍콩과 영국을 오가며 이미 바쁘기도 했고, 소송을 하면서 따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지난주, 수능을 일주일 앞두고 기숙사에서 나온 아이와 밥을 먹는데 조심스레 물었다.
"나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엄마 혹시 아빠랑 이혼한 거야?"
"응."
"그런데 왜 얘기 안 해줬어?"
"숨긴 거는 아니고, 안 물어봐서 굳이 얘기 안 해준 거야."
"왜 한 거야?"
"그냥 성격이... 안 맞아서."
"진짜로 왜 나한테 이혼한 거 말 안 해줬어?"
"처음에는 곧 사춘기가 올 때라서 숨겼고, 더 커서는 특목고 입학해서 스트레스도 많은데 굳이 이혼 사실을 알려서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물어보면 사실대로 말은 해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너는 언제부터 알고 있다가 지금 물어본 거야?"
"엄마랑 아빠가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르고 맨날 나를 통해서 물어보니까... 어느 순간 둘이 얘기를 안 하는구나 싶어서 자연스럽게 알았지. 그리고 나 사실 엄마 아빠 이혼할 거라는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알았어. 할머니가 나 붙잡고 '너희 엄마 아빠 이혼 말릴 사람은 너밖에 없다. 네가 말려줘야 해'라고 볼 때마다 울면서 얘기해서 알고 있었어."
나를 닮아 더 마음 아픈 내 아이... 어린 마음에 쉽게 물어보지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많은 고민과 슬픔을 품고 있었을지 생각하니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전남편과는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가장 찬란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우리 아이도 언젠가는 가슴 뛰는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길 바란다.
이혼에 대한 진짜 이유인 전남편의 외도를 아이에게 끝내 말하지 못한 건, 그저 전 남편을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전에 불필요한 상처나 선입견을 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혼의 진짜 이유는, 아마도 내 마음속에 영원히 비밀로 남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비밀, 암 투병
작년에 암 투병 사실을 숨겼다.
기숙사에 지내다 주말에만 집에 오는 아이에게,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으로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초기암 이기도 했고, 항암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검사에서 다행히 항암 패스에 당첨되어, 수술과 방사선 치료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6개월 동안 휴직을 했지만, 주말에만 집에 오는 아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방학 때도 공부하느라 거의 집에 없어서, 아이는 결국 내가 병을 앓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세 번째 비밀, 퇴사
내년에 해외로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는 대학 졸업 후 어느 로스쿨에 갈지,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을 할지까지 인생 10년 계획을 미리 세워둔 전형적인 계획형이다.
내가 퇴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분명 자신의 유학 자금부터 걱정할 테니, 아직은 이 이야기를 숨기기로 했다.
나 역시 한때는 모든 일을 계획하고, 플랜 B, 플랜 C까지 꼼꼼하게 세워두며 살아갔다.
하지만 안 되는 일을 억지로 이루려다 좌절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일로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던 경험들이 쌓이면서 이제는 다른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그리고 살면서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삶도 충분히 의미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내 아이는 아직은 목표를 세우고, 목적 달성을 위해 노력을 하며 한 가지씩 이루어가는 나이이다. ‘파워 J’ 답게 혹시라도 자신의 인생 계획을 아직 확실치 않은 나의 새로운 일 때문에 포기하거나 돌아가는 길을 고민하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새롭게 시작한 일이 충분히 자리 잡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퇴사 소식은 잠시 비밀로 남겨두려 한다.
그런데 딸도 비밀이 있었다
지난주 수능을 보고, 주말 내내 잘 줄 알았는데 토요일 일요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 열 시가 되어 들어왔다.
친구들과 재밌게 놀다 오는 줄 알았더니 오늘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한다.
"엄마 나 사실 얘기 안 한 게 있는데, 주말에 공항에서 이틀 동안 아르바이트해. 그리고 내일부터 SAT 영어 과외도 해."
"왜 말을 안 했어?"
"못하게 할까 봐..."
"그 돈 벌어서 어디다 쓰게?"
"맥북도 새로 사고, 2월에 동유럽 여행 갈 때 경비로 쓰게."
"네가 경험삼아 해보고 싶으면 하는데, 돈 때문에 힘들어도 하는 거면 바로 그만둬. 엄마가 그 정도는 다 해줄 수 있어."
대화를 하다 문득 깨닫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도, 때로는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나의 대책없는 퇴사할 결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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