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넘는 직장생활 동안 내 기상 시간은 항상 5시 40분에서 6시 사이였다.
지난주 월요일, 11월 17일부터 회사에 가지 않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알람을 끄는 것이었다.
눈이 저절로 떠질 때까지 잠을 자고, 여유 있게 커피를 내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침 6시 20분이면 눈이 떠졌고, 다시 잠들려고 애써도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하던 아침 기상이 이제는 저절로 눈이 떠지는 것이 억울했지만 더 이상 아침마다 풀메이크업을 하고 바쁘게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몸과 마음은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더는 오피스룩을 챙겨 입지 않아도 되니 평소에 잘 입지 않던 옷들과 필요 없던 물건들을 당근에 팔아보기로 했다. 16년 전에 산 코트부터 3년 전에 산 패딩까지, 오래된 옷이지만 일 년에 몇 번 안 입어 상태가 괜찮아서 금세 팔렸다.
며칠 사이 꽤 목돈이 생겨서 나름 흐뭇해하며, 2년 전 엄마가 누군가에게 받았는데 끈 없는 건 사용하지 않는다며 나에게 준 클러치가 생각나서 올렸다. 박스채 모든 게 그대로 보관 된 새 상품...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매자가 나타났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엇, J씨다.'
3년 전 우리 팀 백오피스로 들어왔던 계약직 사원이었다.
회의실 예약부터 회의 전 음료 및 서류 준비, 외부 미팅 일정 잡기, 출장 비행 편과 호텔 예약 등 팀의 모든 지원 업무를 꼼꼼하게 챙기며 든든한 TA(Team Assistant) 역할을 해주던 분이었다.
J씨가 입사 후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마침 출장 간 직원이 단 한 명도 없어 팀원 모두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라 회식자리를 갖게 되었다. J씨도 술도 마시고 웃으며 대화하며 분명 잘 어울렸는데 1차가 끝날 무렵 안 좋은 표정으로 집에 가겠다며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이후 J씨는 더 이상 회식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심도 따로 먹고, 밥 먹고 30분씩 하던 산책도 빠지며 나를 포함한 다른 팀원들과 거리 두기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업무는 늘 해왔던 대로 완벽하게 잘해주었다.
J씨가 싸늘해진 이유는 분명 회식자리에서 누군가 실수한 사람이 있었을 거라며, J씨와 무슨 대화를 나눴었는지 서로 기억을 되살리며 이유가 될 만한 것들을 찾기 위해 애썼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결국 팀장인 내가 J씨를 따로 불러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회식 때 아무 일도 없었고 계약 마칠 때까지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하다가 나가고 싶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팀원들이 서로 떠들고 웃다가도 혼자 무표정으로 모니터만 보고 있는 J씨가 신경쓰여 눈치보기 시작했고, 카페에서 다 함께 먹을 디저트나 음료를 사 와서 J 씨에게 건네주어도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퇴근을 하여 누군가가 다시 가져가거나 그대로 버려야 하는 매우 불편한 상황이 생기기 시작했다. 챙겨주는 걸 노골적으로 거부하는데 그렇다고 안 챙길 수도 없는 ...
시간은 빨리 흘러 미국과 유럽 장기 출장 두 번 다녀오니 어느덧 J씨의 계약 종료일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편하긴 했지만 어느 순간 이 불편함도 익숙해졌고, J씨의 업무에 아무도 불만이 없었기 때문에 계약 연장을 위해 J씨를 불렀다.
"벌써 다음 달이면 일 년이 되더라고요. 그동안 수고해 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J님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하면 좋겠는데 J님 생각은 어떤지 듣고 싶어요."
"저는 그만두겠습니다."
"전에도 한 번 물어보긴 했는데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했어요. J님이 왜 갑자기 거리 두기를 했는지 알고 싶어요. 첫 회식 이후인 것은 알겠는데... 혹시나 누군가 언짢은 행동이나 발언을 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 부장님 때문에 그런 건데요"
"저... 저요? 어... J님이랑 떨어져 앉아서 따로 얘기하지도 못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가 무슨 말을 했을까요? 회피하려는 게 아니고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니까 알려주세요."
"부장님이... 'J님 덕분에 우리 팀이 핵심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서 항상 너무 고맙게 생각해요'라고 하셨잖아요. 그 '우리 팀'에 저는 소속이 안 되어 있는 걸로 느껴졌어요"
"... 음.... 그러면 제가 만약 'L대리님 아이디어로 우리 팀 기획안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을 때 L대리는 우리 팀이 아닌 건가요?, '저 출장 간 사이 우리 팀 고생 많았어요'라고 한다면... 저는 우리팀이 아닌가요? 말이 안되는 소리잖아요. 저는 한 번도 J님이 우리 팀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없을뿐더러 왜 저 말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 더 기분 나빴던 것은 '핵심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다'라는 표현이었어요. 제 업무는 무엇이길래 부장님 포함 다른 직원들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고 하시는지..."
"J님은 팀비서이고, 팀비서 업무가 다른 직원들 업무의 집중력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거잖아요."
"다른 회사는 서무로 들어와도 일 똑 부러지게 잘하면 부장들이 알아서 다른 업무도 주면서 키워주려고 노력한대요. 부장님은 그럴 생각조차 없었잖아요"
"다른 회사 어디요? 저는 처음 들어요. 특히 우리 회사처럼 R&R을 명확히 하는 외국계 회사에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요?"
"인터넷에서 많이 봤어요. 블라인드만 봐도 많고..."
"저한테는 근로계약서상 명시된 업무 외 다른 업무를 시키거나 보직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없는 게 아니라 주기 싫었겠죠"
내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걸로 열 살 어린 직원과 말싸움만 하는 것 같아 일단 J씨를 자리로 돌려보내고 HR에 연락해서 J씨를 채용할 당시 채용공고와 근로계약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후 내용을 확인했다.
본인이 어떤 업무를 하는지 모르고 들어온 것도 아닌데, 왜 순수하게 고마움을 표현한 말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건지 화가 났다.
오해를 풀지 못한 채 J씨의 마지막 근무일이 되었고, 그럼에도 나가는 사람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길 바라며 명품 립스틱과 카드를 준비해 위의 발언은 정말 상처 주려고 했던 게 아니고, 속상하게 했다면 나의 부족함이니 용서를 바란다며 메시지를 적어서 전달했다.
그리고 외부 미팅이 있어 사무실을 나왔다가 바로 집으로 퇴근했는데, 다른 직원이 찍어 보내준 그만둔 J씨의 텅 빈 책상 위에는 나의 선물과 카드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 후로 J씨를 잊고 살았다. 그녀를 대신해 새로 들어온 직원은 자잘한 실수는 있지만 밝은 성격과 재치로 팀에 금세 어울렸다. 팀에 긍정적인 기운이 돌기 시작했고, J씨 생각이 점점 옅어졌다.
그런데 당근 판매자와 구매자로 내가 사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만난 것이다.
난 J씨가 나인 걸 확인하면 바로 돌아설 줄 알았다.
그런데 환하게 웃으며 "부장님 잘 지내셨어요? 이렇게 만나네요"라며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네. 잘 지냈어요? 너무 신기하다. 이 동네에 살아요?"
"아니요. 동생 집에 놀러 왔는데 동생이 지금 만삭이라 제가 대신 사러 나온 거예요"
"너무 오랜만이네. 괜찮으면 저희 집에 가서 커피 한잔하고 갈래요?"
"네 좋죠"
그렇게 우리 집에서 J씨와의 뜻밖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저.. 그 회사 그만두고 부장님한테 너무 죄송했어요. 사실은 제가 열등감으로 못나게 굴었던 거 같아요. 다들 명문대 아니면 유학파... 거기다 제가 급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제가 계약직이지만 나이가 32인데, 신입 대졸 사원보다도 2천 가까이나 적더라고요. 그것에 대한 불만과 열등감이 부장님이 좋은 의도로 던진 한마디에 터져서 못나게 굴고 나온 거예요."
"그렇게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당시에는 너무 억울했는데 그 이후로 저도 좋은 의도로 하는 말이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어요. 상대방의 입장을 잘 모르면 나도 모르게 상처 줄 수 있겠더라고요."
J씨는 다행히 우리 회사의 경력으로 스타트업이지만 탄탄한 곳으로 입사를 했고, 회계팀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대리 직급도 달았다는 자랑도 함께...
난 축하한다며 팔려고 했던 클러치는 새 상품이니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만삭인 여동생에게 잘 쓰시라고 전해 달라며...
J씨도 이번에는 웃으며 나의 선물을 받았다.
그녀가 돌아가고, 거래처에 보낼 제안서를 만들고 있는데 톡이 왔다.
J씨가 고맙다는 메시지와 함께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보낸 것이다.
꼬였던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풀려
새로운 의미를 남기게 되었다.
대책없는 퇴사 이야기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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