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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 회사의 송년회에 오라고요?

by 티타임 스토리

지난주 금요일, 전 회사의 직장 후배 3명이 우리 동네까지 놀러 왔다.


겨우 3주 만에 만나는 건데, 이제는 ‘회사 사람’이 아니라 ‘바깥사람’이 되어서인지 더 반가웠다.


나를 대신해 새로 팀장으로 온 부장은 회의 시간마다 혼자 한 시간 넘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 사소한 것도 지적질을 하는 꼰대라며 후배들이 새 팀장 험담을 풀어놓았다.


“너네 나 없을 때 내 욕 많이 했지?”


“에이~ 부장님은 우리를 뭘로 보고... 조금밖에 안 했을걸요?”


“고~오맙다 그래...”


그러다 동료 한 명이 웃으면서 말했다.


“부장님한테는 불만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뭐?”


“선 긋는 거요. 농담도 잘 받아주고, 잘 어울리고, 그래서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더 이상은 못 다가오게 선을 딱 그으시잖아요.”


잠깐 생각하다가 인정했다.


“맞는 말 같아. 친구 중에 나한테 엄청 집착하는 애가 있었거든. 이것저것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싶어 하고, 내가 먼저 연락 안 한다고 섭섭하다고 울기도 하고... 그래서 만나기 싫을 때도 억지로 나가고, 매번 연락 잘 못 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눈치 보고... 스트레스 받던 참에 내가 출장 가서 다른 친구랑 찍은 사진을 스토리에 올린 걸로 자기랑 찍은 사진은 안 올리면서 다른 친구 사진은 올렸다고 뭐라고 하길래 그냥 차단한 적 있어.”


“저희한테 친구도 차단하는 사람이니 선 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건가요? 그런데 솔직히 저 같아도 친구가 저렇게 집착하면 차단할 것 같아요. 친구가 마음 편해야 친구지, 스트레스만 주면 뭐 하러 만나요.”


“그런데 너네는 퇴사한 상사한테 고기 사달라고 찾아오는 거 자체가 이미 선 세게 넘은 거 같다고 생각 안 해?”


“네.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하하.”


그때 다른 동료가 사업하는 것에 관해 물었다.


“회사 관두고 사업하니까 어때요? Pros and Cons 좀 말해주세요.”


“음... 둘 다 혼자 일하는 거. 사업을 하게 되면 모든 결정을 혼자 해야 된다는 게 두려웠는데 오히려 그 부분은 아직까지는 편하고 좋아. 단점은 세금계산서 발행, 은행이나 구청 같은 데 직접 가야 되는 거... 이런 업무들이 귀찮고 싫어.”


“저 퇴사할 테니까 경리 직원으로 채용해주세요. 저는 단순 업무 좋아요.”


“일단 5년만 더 회사 다녀봐. 그만뒀지만 우리 회사만큼 괜찮은 곳도 별로 없는 것 같아.”


“업무 강도가 너무 세요. 야근은 없지만 출근해서 뭐 하다 보면 금방 점심시간이고, 뭐 하나 처리하면 금방 4시고... 출장도 많고...”


“정신없이 바쁠때도 있지만 조금 널널할때도 많잖아. 그리고 연봉이 높잖아. 대리급부터 억대 연봉 받는 곳 많은 것처럼 보여도, 막상 주변에서 얘기하다 보면 별로 없더라. ”


그때 또 다른 후배가 송년회 얘기를 꺼냈다.


“아, 맞다! M이 부장님 송년회 초대하라고 했어요.” (M은 본사 임원이고, 미국인이다.)


“M이 12월에 한국에 와? 송년회 참석한대?”


“네. 마지막 인사 부장님 얼굴 보고 하고 싶다고, 꼭 와 달라고 했어요.”


“가는 건 상관없는데, 다른 부서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지... 일단 생각해볼게.”


M은 내가 퇴사하겠다고 했을 때, 거의 한 시간 동안 화상회의로 말리던 사람이었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굳이 덧붙이자면, M은 여자다.)


“부장님 섭섭해요. 우리가 송년회 오시라고 지난번에 얘기했을 때는 단칼에 거절하더니 M이 오라고 했다니까 오신다고...”


“생각해본다고 ㅎㅎ 그리고 아무리 퇴사했어도 너네가 얘기하는 거랑 C레벨이 얘기하는 거랑 같니...”


"아무튼 결정되면 M에게 이메일 주세요. 저희는 송년회 초대에 관한 내용 전달했어요~"


후배들과 2차까지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길, 작년 송년회가 떠올랐다.


2023년까지는 늘 저녁에 송년회를 했는데, 작년에는 처음으로 오전에 근무를 마무리하고 회사 근처 호텔 뷔페에서 점심을 먹고 2차는 참석하고 싶은 사람만 이동해서 술을 더 마시고 자유롭게 헤어졌다. (그리고 더 놀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3차를 갔다가 4차인 노래방에서 마무리되었다.)


작년 송년회 반응이 좋았는지 이번에도 그렇게 진행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퇴사한 사람이 송년회에 가는 것부터가 이상하지만, 만약 간다면 어디까지 있어야 할지도 애매했다. 밥만 먹고 나와야 할지, 마지막 회사 송년회이니 노래방까지 갈지...


주말 동안 고민을 좀 하다가 결국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M에게 메일을 보냈다. 미안하지만 송년회는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고...


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송년회에 가는 걸 망설였던 이유는 단순히 ‘퇴사한 회사라 어색해서’가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자리에 가서 여전히 나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고, 그 인연을 통해 내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건 결국 진심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함께 일했던 시간이 그리워서라기보단, 그 관계를 붙잡고 있으면 언젠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의도.


그걸 깨닫는 순간, 스스로가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않은 자리에는 가지 않는 게 맞다. 대신 진짜 이어가고 싶은 인연들과는 후배들과의 자리처럼 따로 만나서 마음을 나누면 된다.


15년의 영국생활을 마치고 두려운 마음으로 시작하게 된 첫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이었다.


처음으로 한국 사람들과 일해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리고 나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미리부터 불안했던 시간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 동시에, 내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그리고 퇴사를 한 이상, 여기까지가 맞다...


함께 웃고, 고민하고, 성과를 만들어내며 쌓아온 모든 시간들은 이미 내 안에 충분히 자리 잡았다.


이제는 미련이나 계산 같은 마음을 내려놓고, 그 시간에서 얻은 진심만을 가지고 앞으로의 관계를 쌓아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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