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중순,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치자 달이 떠올랐다. 세상의 아픔과 기쁨을 속속들이 어루만져 주는 곱살스러운 달빛이다. 달이 ‘위헌재韋軒齋’ 돌담에 박힌 깃대종 석류나무를 기대고 있을 때 마당에서는 멍석(전라도 사투리, 덕석)을 펼치고 “위헌재 달빛 마당놀이”가 시작되었다. 모닥불이 타오르고, 연기가 하늘로 오르자 노老교수는 ‘수백 년 묵은 종가 터/ 장독대 옆 우거진 풀을 매다가/ 우연히 동물 뼈 한 조각을 발견했다.’라고 《시간의 뼈》를 읊조렸다. 달이 마당을 비켜날 때쯤 문학강연과 새소리처럼 맑고 부드러운 오카리나가 연주되고, 시월 저녁 바람을 타고 흐르는 가야금 소리는 그윽했다. 마음을 치유하는 소리다. 그리고 기타 소리에 들려오는 지리산 노래가 가슴에 머문다. 아무 말이 없구나/스치는 바람 소리뿐/험난한 세월에도 쓰러지지 않았구나/반야봉에 새소리 백무동에 물소리/지친 영혼 어루만져 주는 /그대 이름은 지리산 / 아 아 그대 이름은 지리산
오랜만에 만끽해보는 마당놀이였다. 남도에서는 대보름 무렵이면 마을 당산에 고사를 지낸 후 당굿(마을 굿)을 했다. 그리고 농악대는 가가호호 방문하여 지신밟기를 하였다. 부엌에서 불의 신 조왕신에게 하는 굿을 ‘정지 굿’이라고 했다. 마당에서는 우물이 마르지 말라고 ‘마당 굿’을 했고, 외양간에서는 가축이 건강하게 자라라고 ‘외양 굿’을 했다. 이런 지신밟기의 목적은 마을과 가정의 평안을 빌었고, 농악대가 돌아다닐 때는 마을은 축제의 공간이 되었다. 이제 이런 문화가 사라진지 오래다. 오늘 ‘달빛 마당놀이’를 보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화와 산업사회를 걸쳐 첨단과학 시대로 전환되면서 우리는 “마당”을 잃었다. 그리고 마당에서 펼쳐졌던 이웃사랑과 공동체의 예의범절 등 내적 사고가 가득한 전통문화를 잃어버렸다. 이제 정체성마저 잃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며칠 전 ‘위헌재韋軒齋’ 외우畏友 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맛깔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마을이 떠나갈듯한 소음 놀이가 아니라 두런두런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문화를 즐기는 시간이었다. 이런 마당놀이를 요즈음 시대에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다. 재력이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행사는 더더욱 아니다. 당주當主의 깊은 철학과 인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무엇을 바라고 하는 행사가 아니다. “사람이 좋아서, 지인들이 보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손수 음식을 장만해 대접하면서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야말로 사람 사는 본모습이다. 놀이가 끝나고 서로에게 술잔을 건네며 웃음꽃이 피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서 반갑다고, 건강하시라.”라는 덕담과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서로를 다독이며 술잔이 오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 뜨거운 시간이었다. 언제 또 이런 놀이를 경험할 수 있을까.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던 보고픈 지인들을 언제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만나 안부를 묻고 정담을 나눌 수 있을까. 대문 밖을 나오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아름다웠고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