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용수 스님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으로 인해 젊은이들이 타락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아테네 정부로부터 고소당했습니다. 그러면서 아테네 정부는 신념을 포기하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독이 든 잔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면회하러 온 가족들을 돌려보낸 후, 얼굴을 면포로 가리고 나서 독배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제자와 친구들과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철학자에게는 죽음은 행복이다. 죽음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나는 생전에 악한 일을 한 일이 없고, 죽는 이 순간까지 착한 일을 해 왔을 뿐이다. 현생이든지 내생이든지 선인에게는 악보가 없는 법이다. 무엇 때문에 내 죽음을 슬퍼하느냐.
나는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볼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라는 그림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님,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는데 우리는 삶의 고통을 겪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죽은 존재이기에 죽어가는 모든 생명체에 자비심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 스님 : 불교에서는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에 불과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집착이 아니겠습니까?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볼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생명에 대한
집착이 없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신념에 확신하는 철학자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삶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서산대사의 《해탈 시》 중에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 死也一片浮雲滅이라고 했습니다. “삶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구름이 스러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집착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삶의 집착이 강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겠지요. 죽음이란, 이승의 삶이 이어지는 사후 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또한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첫 번째 고통은 죽음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