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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Jun 02. 2024

4. 선택, 아내, 엄마 그리고 여자

수정은 여자에서 다시 아내, 엄마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연애가 목적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시간에 만나는 것이 기다려지더니 어느새 그리워하는 자신을 보며 수정도 깜짝 놀랐다. 매일 보는 남편 얼굴, 딸, 군대 간 아들의 전화 목소리. 이런 것들의 소중함과 상철이 주는 설렘 사이에서 수정은 생각이 깊어졌다. 머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가슴은 늘 상철을 향하고 있었다. 남편이 주는 안정감이냐 상철이 주는 설렘이냐를 두고 굳이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도저히 선택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중년의 나이에 활력을 더해준다는 긍정의 논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기합리화가 길어지면 신념으로 바뀌는 법이다. 경영자 최고위 과정 8개월 차에 접어들어서 둘은 마음만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라 매일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로 발전했다. 초반에는 더블데이트니 뭐니 하면서 넷이 만났지만 3개월 후부터는 둘만의 시간이 좋았다.

10월 어느 날 상철과 수정은 여느 때처럼 퇴근 시간에 만났다. 둘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계획했다. 먼저 꺼낸 건 수정이었다.

“상철 씨. 솔직히 난 상철 씨가 좋아. 생각해봤는데 우리 둘이 한 일주일 정도 여행을 가보고 싶어.”

수정의 직진에 상철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매번 선을 넘지 말라며 경고를 날리던 그녀가 오히려 도발을 해오는 상황이었다. 상철로서는 연애도 아니고 썸만 타는 어정쩡한 관계가 싫었다. 어떻게든 관계를 발전시켜서 특별한 사이가 되든지 아니면 끝내든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렇다고 그녀를 결혼 상대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서른아홉이 될 때까지 오직 사업만 생각하고 살았다. 결혼도 생각해봤지만, 독신이 편했다. 아니 독신으로 살면서 누리는 삶의 자유를 결혼이라는 구속의 틀에 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늘 자유인을 외쳤다. 상철에게 수정은 쏘울과 섹스를 함께할 수 있는 여러 여자 중 한 명이었다. 아직 섹스단계는 가지 않았지만, 그 선을 넘는다고 해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그녀가 너무 착 달라붙어도 싫었고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선을 넘나들며 서로 희롱하는 것을 즐길 뿐이었다. 이제 그녀가 선을 넘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상철은 그녀가 가정을 버리고 자기에게 올인하지 않을 걸 알았다. 본격적인 연애를 해보자는 것으로 생각하니 쏘울+섹스 관계를 완성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정 씨랑 나랑 10살 차이에요.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나이 차이를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수정 씨의 제안에 왜 갑자기 나이 차이를 이야기하는지 어이가 없겠죠? 그런데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지난 8개월 동안 수정 씨는 나를 늘 동생 취급을 했어요. 전 그럴 때마다 아름다운 한 여자로만 생각했지 나이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부터 지구상에 이상철이라는 한 남자와 백수정이라는 한 여자로만 생각해요. 그 어떤 외적인 기준은 필요 없어요. 아담과 이브가 유일한 존재였듯이 이상철과 백수정도 유일한 존재예요. 서로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 말이에요.”

상철의 말에 수정은 온몸이 짜릿해졌다. 상철의 혀가 전기충격기 같았다. ‘그래, 너도 남자이고 싶다는 거지?’ 수정은 상철의 눈을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알았어요. 그럴게요. 지구상에 유일한 남자로 이상철을 바라볼게요.”

수정은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상철이 통제하는 대로 말했다.

“와우, 오늘은 참 행복한 날이네요. 아무리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을 거 같아요.”

“내일 아침 일찍 계약 건이 있잖아요? 사업도 중요하니까 오늘은 나만 마실게요.”

상철은 괜찮다고 했지만, 사업하는 사람 입장은 사업하는 사람이 잘 아는 법이라며 수정이 극구 말렸다.

“대신 내가 취하면 내 차 운전해서 집까지 데려다줘요.”

“그럼. 할 수 없죠. 그럴게요.”

수정은 자신이 한 말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와인을 연속해서 마셨다. 아니 먼저 선을 넘겠다고 선언한 것에 대해 상철의 진심과 용기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어떻게 되든 믿음직한 남자가 있으니 마음껏 자유를 불러내고 싶었다. 세 병째 와인이 들어왔다. 상철이 더 마실 수 있겠냐고 물었다. 수정은 풀어진 눈으로 상철을 바라봤다. ‘참 잘 생겼다. 딱 10년만 어렸어도. 딱 20년 전에만 나타났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풀린 눈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 상철의 얼굴이 흐릿해지더니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졌다. 목은 이미 무게를 감당할 근육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로, 와인이라는 알코올로 녹아버렸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상철이 외치는 ‘수정 씨, 수정 씨’라는 말이 동굴의 울림처럼 점점 가늘게 들렸다. 상철이 수정을 깨웠다. 수정이 눈을 떴을 때 낯익은 대문이 보였다. 집 앞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수정은 상철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오늘 와인을 많이 드셔서 제가 모시고 왔어요.”

수정은 고개를 돌려 집 대문을 바라봤다. 들어가기 싫었다. 꿈이라면 현실로 돌아오기 싫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상철을 바라봤다. 아무 말 없이 상철의 눈을 바라봤다. 상철은 수정의 끌어당김에 조금씩 조수석으로 몸을 움직였다. 둘의 강렬한 텔레파시가 서로의 입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상철은 오른손으로 수정의 목을 감싸며 수정에게 키스했다. 상철의 혀가 들어가자 수정은 가슴을 내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호흡이 빨라졌다.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얼마만의 키스인가? 수정은 둘째를 낳고부터 남편과 키스를 하지 않았다. 왜 안 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냥 키스하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20년을 키스 없이 섹스를 했는데 지금 하는 키스는 섹스보다 더 황홀했다. 마치 첫 키스를 다시 하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는 하얘졌다. 잠시 후 상철의 왼손이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가슴을 더듬었다. ‘하악 하악’ 상철의 손 움직임에 따라 수정의 호흡도 리듬을 탔다. 상철의 손이 스커트 사이로 들어왔다. 촉촉해진 그곳을 손가락으로 밀고 들어왔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수정은 몸을 돌려 상철의 가슴을 만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차 돌려요. 오늘 상철 씨랑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요. 빨리요.”

상철은 다시 라이트를 켜고 기어를 드라이브에 놓고 힘껏 가속페달을 밟았다. 차는 ‘끼익’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듯이 골목길을 달렸다.     

호텔을 찾아 달리는 차 안에서 수정은 알 수 없는 침묵과 시선 속에 욕망의 끓어오름이 가득 차 있었다. 남편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욕망,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과 욕정이 발정 난 암고양이처럼 창밖을 향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상상만으로도 스커트 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굶주린 욕망의 숨소리만 존재할 뿐이었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둘은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는 모두 벗어버렸다. 너무나 강렬하게 원하는 하나가 되어 서로의 몸을 탐닉했다. 수정은 황홀한 감동의 느낌을 담아 소리를 질렀다. 상철도 숨겨진 본능을 불태우는 수정을 보며 근육이 터지라고 피스톤을 움직였다. 잠시 후 수정은 사랑의 격정이 지난 자리에서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모든 기력을 소진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온 열정을 다해 피어올랐던 불꽃이 점점 꺼져가면서 하얗게 불태워버린 자신의 육체를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만족했다. 너무나 만족했다. 죽어도 좋아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한바탕 격렬한 사랑의 레슬링을 마친 두 선수는 서로 꼭 껴안고 거친 숨을 다듬었다. 상철은 수정이 자신의 여자가 된 것처럼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사랑해요. 이제 수정 씨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수정은 아직 감동의 리듬이 남아있었다.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그의 말에 다시 흥분되기 시작했다.

“내 사랑을 보여줄게요.”

수정은 상철을 바로 눕혔다. 그리고 상철의 위로 올라탄 후 상철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둘은 다시 뜨거워졌다. 그렇게 그날 밤 세 번의 오르가슴이 있고 난 뒤에야 사랑의 폭주를 멈출 수 있었다.          

1004호.

수정은 그날 밤을 생각했다. 그 시간 이후 수정은 한가지 수식어가 추가되었다. 아이들의 엄마, 정호의 아내, 그리고 상철의 여자였다. 그런 역할이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팔딱팔딱 뛰는 활어처럼 살아 있음을 느꼈다. 상철과의 관계 이전에는 고요한 수족관의 물고기였다면 지금은 거친 바다에 던져진 자유로운 활어였다. 그런 자신이 부끄럽지 않았다. 당당했다. 지금의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면 정말 억울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상철이 고마웠다. 남편은 안정감을 주는 영역에 묶어두고 상철은 사랑과 섹스의 영역에 묶어두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지금의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상철 씨가 원조교제라니, 쓰리썸을 하려 했다니, 그것도 미성년자하고 자신을 동시에'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수정은 최근 들어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의 삶에서 상철을 도려내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상철의 숨겨진 변태 기질을 본 이상 더 관계를 지속한다는 건 감당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여기서 멈추자.’ 수정은 1004호를 나왔다. 오늘 밤 그녀가 꿈꿨던 뜨밤은 사라졌다. 대신 현실의 문이 열렸다. 최소한 지금은 아이들 엄마, 정호의 아내 둘만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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