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좋은쌤 Oct 20. 2022

외롭도록 이뻤던 시절

추억 한 장과 인터뷰




- 안녕? 흰 모자 흰 나시에 흰 반바지, 갈색 워커를 신고 있는 너... 아니, 나

- 싱긋 웃고 있지만 뭔가 세상의 근심을 안고 있는 느낌이구나. 넌 지금 어디니? 




    

안녕!     

나는 지금 중국 하얼빈이야. 나는 여름방학을 맞아서 중국에 와있지. 정말 오기 싫었지만 아빠가 보냈어. 나는 아빠와 사이가 아주 안 좋아.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 음악을 선택했어. 밴드 생활을 하며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 그런데 딱 들킨 거야. 세상에... 아빠가 내 일기장을 훔쳐본 거야. 말이 돼? 친구 한 명 없이 나는 혼자 중국에 왔어. 너무 슬퍼.      



- 근심을 안고 있다는 느낌이 맞았구나. 하지만 싱긋 웃고 있는데 정말 재미가 없어?     



사실... 재미가 없지는 않아. 내가 이런 느낌을 가져도 될까... 남자 친구에게 미안하기까지 해. 오늘 나는 학교 수업을 째고 여행을 왔거든. 전국에서 온 새로운 사람들과 친구가 됐어. 나의 어설픈 서울말을 따라 하며 같이 웃고 장난치는 사람들. 많이 두렵고 슬펐지만 조금씩 극복하고 있는 중이야.     



- 너의 이야기를 좀 더 들려줘. 22살의 젊은 수민아.     



나는 딱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었어. 내가 혼자 죽을 상상과 작은 시도들을 해보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그러기엔 나는 너무 해맑았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다가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저 헤헤 바보같이 웃는 아이거든.      

어쩌면 죽고 싶다는 생각은 사치였는 지도 몰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어. 

항상 공부만 강조하는 부모님. 선생님. 

수능을 치는 날 나는 대충 답을 써버리고 그냥 자버렸지 뭐야. 통쾌한 복수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담임선생님 손에 이끌려 대학을 쓰고 말았지. 정말 최악이었어.      


내 인생은 온통 거짓이야. 나이도 속이고 학교를 일찍 들어갔고 극성인 부모님이 이끄는 대로 살 수밖에 없었지. 내 삶이 아니었어. 10년 가까이 쭈욱 거짓된 삶을 산거야.      

부모님 체면을 못세우고 지방대에 들어가서 공부는 커녕 밴드에 들었지. 멋지지않아? 반항아로 보여도 상관없어. 내가 좋으면 그만이야. 


나는 드럼을 쳐. 상상으론 머리를 실컷 흔들면서 멋지게 헤드뱅잉을 하고 있지만 사실 현실의 내 모습은 ‘공주 드럼’이래. 정말 맘에 안 들어. 고개 까딱까딱 새침하게 공주처럼 드럼을 두드린다나? 나는 아주 다크 한 음악을 하고 있다고! 근데 정작 듣는 사람들은 펑키하고 귀엽게 친다고 드러머가 저렇게 보이기도 쉽지 않다며 좋아하지.      

지금 내 머릿속엔 어떻게 메탈리카와 메가데쓰의 드럼 소리를 똑같이 흉내 낼 수 있을지 고민이야. 여기 중국에서도 계속 그 음악을 듣고 있어. 그런데 얼마 전에 나온 메탈리카의 신보가 너무 실망스러워. 그전의 묵직함을 버리고 너무 가벼워진 느낌이야. 이래서야 예전의 명성을 찾을 수가 있겠어?     

내 남자 친구는 기타리스트야. 정말 멋지지.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야. 나는 남자 친구보다 어머니랑 훨씬 더 친해. 아마 우리가 헤어지면 그의 어머니가 엄청 나를 보고 싶어 할 거야. 분명해.      


여기는 나를 간섭하는 아빠도, 남자 친구도 없어. 나 혼자지.      

중국의 새로운 친구들. 어색하지만 이 느낌이 살짝 좋아지려고 해. 생각해보니 내가 죽고 싶다는 건 껍데기였을 뿐이었어. 항상 내 주변엔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가득했거든. 나를 사랑하는 친구들. 하나뿐인 내 동생, 엄마 아빠...

사실 이 모든 사람들이 내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고, 너 없으면 안 된다고 붙잡아 주고 있었는데... 나는 언제 어디서부터 이렇게 삐뚤어진 걸까.     


어릴 때부터 착하고 이쁘게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어. 나는 눈치가 빨랐고 사랑받는 법을 알았지. 하지만 남다른 의협심은 항상 있었어. 불의를 보면 못 참았거든. 단 한 명 빼고 말이야. 세상에서 나를 가장 공주로 만들어 주는 사람. 바로 우리 아빠. 아빠는 항상 불의를 저질렀어. 내 시선에서는 말이야. 학교 선생님을 매수하고 자기 자식만 끔찍이 생각하는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 나는 그의 불의를 보면서도 외면했어. 그런 내가 싫었어. 

    

나는 여전히 공주야. 슬프게도. 그의 보호라는 미명 하에 있지. 이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머리를 길지 않을 거야. 아빠가 원하는 순종적인 여자는 더 이상 되지 않을 거야. 엄마처럼 기 센 여자가 되면 안 된다며 엄마를 비하할 땐 정말 싫어. 하지만 자꾸...     


아빠 생각이 나.

      

자꾸 내가 잘못한 것들만 생각이 나.      

내가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말과 행동이 생각이 나...     

나는 이대로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 중국 단기 연수를 마치려면 수업을 열심히 듣고 수료증을 받아야 해. 그런데 계속 여행 중이야. 학교를 때려치우지는 못했지만 부모님 몰래 음악하면서 장사를 했었거든. 그 모았던 돈으로 여행경비를 댈 수 있었지. 아주 위험한 중국인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새로 사귄 여행친구들이 나를 지켜줬어. 나는 이제 나를 지킬 줄 알아. 

좀 더 외로울까 봐.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여행도 하고 공부도 좀 더 하고 싶어. 1년 정도 더 있을 생각이야.      


여름이 끝나가. 부모님께 이 얘기를 하면 실신하실 거야. 반대하시겠지? 나는 중국으로 다시 올 거야. 끝까지 외로워 보려고.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 볼 거야.  부모님은 내가 하루빨리 졸업하고 요리학원에나 다니라고 할 거야. 하지만 나는 한 번 더 투쟁하겠어. 내 삶을 위해!     




- 외롭도록 아름다운 그 한 장, 내 시절.. 너를 응원해. 


그리고 너를 생각하며 지금의 나도 새로운 시작을 할 거야. 

현재 나는 외롭지 않아. 가끔은 그때의 외로움이 그립기도 해. 그 시절의 네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단단해질 수 있었어. 그리고 말이야. 나는 지금 아빠를 너무 사랑해. 만날 때마다 안아드리고 뽀뽀도 한단다. 정말 놀랍지?      

딱 내 삶의 반 22살의 수민아, 너는 아마 지금의 나를 보면 놀랄 거란다. 네가 그렇게 재수 없어하는 긴 머리의 여성스러운 사람이 바로 나란다. 네가 울고불고 사랑했던 기타리스트는 얼굴도 기억이 안 나. 네 예상대로 그의 어머니는 많이 우셨단다. 너의 22년 후는 아이가 셋 딸린 아줌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단다. 세상에... 참 웃기지? 인생이란...     


늦은 밤 아이가 자다 깨어 찾는다. 안녕.     






이전 04화 너, 거인병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