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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좋은쌤 Oct 13. 2022

너, 거인병이야?

커다란 귀여움으로 반전을 꿈꾸다

   

“어머 쟤, 최홍만 봐~ 엽기다 정말~”

친구가 티브이를 가리키며 손가락질한다. 티브이 속의 최홍만은 거대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핑크색 옷을 입고 키티를 안고 있었다. 

“거인병에 걸려 가지고 저러고 싶을까! 저 덩치에 키티가 뭐야?” 

친구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뭐... 최홍만은 키티 좋아하면 안 되나... 너 그렇게 말하면 최홍만이 서운하지 “ 

괜히 의기소침해진 내가 최홍만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하다.  

“그럼 니 눈에는 저게 좋아 보이니? 덩치값을 해야지!” 친구는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째려본다. 

“최홍만이 핑크 핑크 한 게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리 열을 내냐” 나는 괜히 친구에게 핀잔을 준다.     


왠지 최홍만이 안쓰러웠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친구 말이 거슬렸다.          

‘덩치... 귀여운 거... 안 어울려...’ 친구가 했던 말들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흥, 키 크고 덩치 크면! 키티 좋아하면 안 돼? 핑크 옷 입으면 안 돼?’ 

마치 내가 욕을 들은 것처럼 빈정 상했다. 

          

나는 큰 키 콤플렉스다. 키가 커서 학창 시절 거의 매년 임시 반장을 도맡았고 운이 나쁘면 반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시선 집중을 받는 건 참 싫다. 원하지 않는 책임을 지는 건 더욱 싫다. 

버스를 타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처럼 보일까 봐 무릎을 구부렸다. 나는 서 있는 것보다 앉아있는 게 좋았다. 앉은키는 크지 않았던 덕에 눈에 띄지 않게 잘 숨을 수 있었다. 심지어 앉아있을 땐 ‘동안’, 서있을 땐 ‘노안’이란 소리를 듣곤 했다.      


나는 아기자기한 것을 사랑한다. 작고 귀여운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보면 힐링되지만 내 것인 양 가질 수 없다. 

고등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 홍딩이는 반에서 가장 작았다. 다른 친구들이 고목나무에 매미 같다며 우릴 놀렸을 때, 나는 고목나무여도 되지만 친구가 매미로 비유되는 게 너무 미안했다. 내가 큰 게 누군가에게 민폐를 주는 것 마냥 느껴졌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어린 왕자 책을 보며 위로를 받았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키 더 컸어? 왜 이렇게 커? 너 볼 때마다 크는 것 같아. 나 좀 떼줘"

“수민아 너는 보기와는 다르게 아기자기 한 걸 좋아하는구나.” 

“너는 키가 크니 남자 친구는 185는 되어야 좀 구색이 맞겠다.”      

자주 듣던 말들이었다. 내 마음속에서 반항심이 솟구쳤다. 내가 키가 커서 아기자기한걸 안 좋아하게 생겼다는 건가? 남자 친구 키는 왜 더 커야만 하는데? 의문이 들었다.     

친구들의 기대와 다르게 나는 키가 작은 남자와 결혼을 했다. 결혼 준비를 할 때 나는 그를 위해 색다른 혼수를 하나 더 준비했다.      


“이게 뭐야? 키높이 깔창?” 그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반가운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좋아?”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도 웃었다. 

그렇다. 나만의 키작남.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아마 신랑의 머리카락이 다 벗겨지고 몸이 쪼그라들어도  내 눈에는 더욱 귀여워 보이지 않을까 한다. 나는 귀여운 걸 너무 사랑하니까.     

결혼식장에서 신랑은 키높이 구두, 나는 양말만 신고 입장을 했다. 그렇게 서니 키가 똑같아졌다. 아직도 안방에 걸려있는 우리의 결혼액자는 내가 서있고 신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원래는 반대 콘셉트로 찍는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앙증맞고 귀여운’ 것을 더 이상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작아도 너무 작은 아이를 낳은 후부터였다.      

“엄마는 큰데 아이는 너무 작네요.”      

소아과에서 매년 듣던 말이었다.  내 아이가 작은 건 마냥 귀엽게만 볼 일이 아니었다. 아기 친구 엄마들이 우리 아이에게 귀엽다고 하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자기 애보다 작다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아이가 네다섯 살이 되던 무렵, 번뜩 떠올랐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잠시 간과했었다. 아이가 건강하게 크기만 하면 되지 욕심을 부렸다. 나는 사실 엄지공주 엄마로 불리는 게 수치스러웠다. 아닌 척했지만 나야말로 보이는 걸 누구보다 중시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아가, 난 널 믿어. 너는 아빠처럼 누구보다 마음이 큰 사람으로 자라줄 거라는 걸!’

      

믿음이 과했는지 아이는 마음뿐 아니라 키까지 커버렸다. 어느새 중학생이 된 그 엄지공주는 또래에 비해 키가 커서 고민이 많다. 그리고 아이의 단짝 친구는 반에서 제일 작은 친구다. 그 시절의 나처럼.      

딸과 가끔 데이트를 할 때면 꼭 매장 안의 아기자기한 것들 구경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키는 어느새 쑤욱 커버렸지만 나에겐 엄지공주처럼 귀여운 우리 딸. 딸은 나를 보며 ‘엄마 너무 귀여워.’라고 말한다.      



‘귀여움’ 이란 건 꼭 사이즈에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세상 속에서 귀여움을 알아볼 줄 아는 마음, 세심하고 사랑스러운 배려, 이 모든 언행이 귀여움을 말해준다. 상대의 숨은 진심을 파악하고 살며시 내가 지어 보이는 사랑스러운 미소와 말투, 이걸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샘 너무 귀여우세요.”라고

‘당신이 더 귀여운 걸요.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어도 내 눈엔 장난기 많은 소녀가 보인다고요.’ 나는 생각한다.           


고등 동창 홍딩이도 키작남 남편도 키, 외모와 상관없이 나보다 마음이 큰 사람이었다. 나의 결핍을 이해해 주고 나를 사랑으로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키가 커서 불편했던 상황들도 있었지만 유리했던 때가 훨씬 많았다는 걸 알았다. 하나의 상황을 두고 좋은 면과 나쁜 면 중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귀여움을 독차지한 연년생 동생이 있어서 어쩌면 엄마에게 더 사랑받고 싶었을, 키 때문에 항상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졌던, 어린 나에게 속삭인다.      

‘귀여움 통찰 안경을 쓰고서, 어디서나 진심가득 까르르 웃는 나,

참 귀여워, 사랑스러워.’ 볼이 발그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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