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키드 전도사의 배교
"아이를 진짜 꼭~~ 갖고 싶음 노력해 보라고 하겠는데, 내가 둘 키워보니까 그냥 자기 삶 재밌게 잘 즐기는 것도 정말로 좋은 선택일 것 같아."
신혼인 고등학교 친구한테 노키드 (No Kids-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 것)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그냥 말한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 친구는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한 번의 유산 후에 적극적으로 임신을 하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8살 딸, 6살 아들을 키우며 육아에 제대로 찌든 나는, 거의 10년 전에 동료 교사에게 들었던 ‘노키드-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할 40가지 이유' 책 이야기를 친구에게 해주었다. 사실 나도 그 책을 추천받고 읽지는 않았지만, 아이 둘을 가진 프랑스 작가가 쓴 그 책을, 두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동료 교사가 힘주어 추천한다는 사실 자체가 제목과 함께 모든 걸 설명해 주었다.
그 당시 2살과 6살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동료 선생님은 이제 막 결혼한 나에게 그 책을 추천해 주었다. 아이를 꼭 가질 필요는 없다며. 나는 그 선생님이 좀 이상하게 보였다. 평소에 딸 자랑을 많이 했던 젊은 엄마다. 아이들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듯해 보였는데, 왜 나한테 이런 책을 추천하지?
게다가 그 프랑스 작가는 아이가 두 명 있다고 그랬다. 그 아이들에게 자기 엄마가 쓴 저 책이 큰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그냥 그 정도 생각만 하고 지나쳤다. 그때의 나는 곧 바로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뒤 한국을 떠나 먼 곳에 와서 살게 되었다. 우리는 아기를 안 갖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주변에 어린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차피 낳을 거면 이웃 아이들이랑 함께 키우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 먹었다. 감사하게도 곧 아기가 생겼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쉽게 생각했다. 다행히도 하나는 키울만했다. 그래서 첫째가 만 두 살도 안 되었을 때 둘째도 낳아 버렸다. 그런데 둘째가 태어나니까 차원이 다르다. 두 배만 힘든 게 아니고 다섯 배 아니 열 배는 힘들어졌다.
아이들을 키워내는 일이 너무 고되니까 몸이 버텨나지를 못 했다. 체력이 바닥나고 산후 우울증 비슷한 것도 겪었다. 둘째가 태어난지 6개월즈음 되었을때 심각한 편두통이 생겼는데 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가끔 고생을 한다. 출산의 고통을 겪고 나면 웬만한 것은 끝난 줄로 믿었다. 하지만 이건 누구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네버 엔딩 스토리다.
육아가 힘들어 미칠 거 같아서 가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도 질렀다. 그런데도 나를 닮은 아이들은 정말 정말 이뻤다. 아이들 재우고 나면 또 그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낮에 놀면서 찍어 놓았던 동영상을 매일 밤 꺼내 들고 남편이랑 애들 너무 귀엽다며 키득거렸다. 미친년도 그런 미친년이 없었다.
미운 네 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자기 자식한테 너무 말을 심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죽하면 저런 표현이 나왔을까 하고 이해가 간다.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제대로 육아를 해본 사람이라면 저 표현에 동의는 못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아무튼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면 제대로 공감할 수 없다는 건 진리이다.
그땐 노키드를 추천한 지인을 이해 못 했지만 내가 아이들 키워보니 이제 완전 이해가 간다며, 임신 노력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를 정~~~ 말 갖고 싶으면 그것도 좋지만, 혹시 그만한 열정이 없다면 노키드도 진~~ 짜 좋을 것 같다고." 그 선택도 다른 선택 못지않게 좋은 선택이라고. 아이를 꼭 가질 필요는 없으니, 본인 인생을 더 잘 즐기는 건 어떠냐고 경험자로 자신 있게 권해주었다.
내가 친구에게 노키드를 추천한 지도 오 년이 지났다. 그 친구는 이제 세 살짜리 딸을 키우고 있다. 요즘 그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할 때는 내가 사춘기 딸이랑 투닥투닥하는 에피소드들을 들려준다. 그러면 자기의 세 살 난 딸은 지금도 힘들게 한다며 나중에 사춘기 땐 갱년기랑 겹칠 텐데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한다. 그러면서 내가 5년 전에 권했던 노키드 이야기를 꺼낸다.
또래 아가들 육아하는 엄마들에게 최근에 나의 '노키트 전도'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목사 사모가 있는데 노키드를 추천했었다고. 그땐 걔가 왜 저러나 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이해가 간다며 자지러지게 웃었단다. 그때는 솔직히 네가 이상해 보였다며, 뭔 소리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 말을 뼈저리게 공감한다고.
그래, 아이가 어려 잠도 제대로 못 잤던 그때는
내가 노키드 전도사라도 된 것처럼 굴었었지.
지금 우리 딸은 만으로 13살이다. 딸은 11살에 시작한 사춘기를 12살에 심하게 겪었고, 이제 거의 사춘기가 지나가는 것 같다. 이제 아들이 11살이 넘더니 사춘기 시작을 알리는 눈빛과 태도와 말투를 보여 준다.
사춘기 아이들 키운다는 거 자체로 그 부모들은 동정받아 마땅하다. 아이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 것처럼 그로 인해 그 부모들도 천지개벽의 시대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가 젖을 먹이느라 잠을 설치는 것처럼, 사춘기 아이와 함께 마음고생을 할 때면 여전히 그때처럼 잠을 설치는 날들이 수두룩하다.
내 세상을 이 아이에게 다 줄 수 있다고 믿어 왔고 그렇게 행동해 왔다. 그런데 하나의 또 다른 세계를 품어버린 그 아이가 이제는 '우리' 세계의 틀을 깨고 변태 하려고 한다. 여태껏 우리가 만들어온 건 어떻게 되려는지? 내가 지금껏 해온 대로 내 모든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계속해서 그 아이에게 주어야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애당초 내 것이 아니었고 언젠가 날아가 버릴 존재였다는 걸 몰랐던 걸까? 머지않아 나비가 되어 날아가 버릴 애벌레를,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온갖 공을 들여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사춘기 딸 덕분에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지만 이제는 잔잔해진 바다를 순항 중이다. 물론 크고 작은 태풍이 또 오기도 하겠지만 먼저 겪은 허리케인덕에 마음의 준비가 조금은 된 것 같다. 이런 요즘에 그 친구와 통화하며 들은 5년 전의 나의 흑역사, 노키드 전도사 시절 이야기는 민망하다. 좀 억울하기까지 하다. 철없는 어린 시절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공중파 방송에서 재방송되는 느낌이다. 물론 그때는 적지 않은 경험에서 우러난 진심을 이야기한 것이라도 말이다. 교회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귀찮아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들켜서가 억울한 게 아니다. 이제 내 인생을 돌아보니 내 딸 아들을 키운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얘기하면 노키드 전도사 시절에는 그런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소중한 내 새끼들이고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잘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컸지만, 이 생명체들로 인해 내가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 삶을 통째로 갈아 넣어 이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걸 꽤나 억울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내 시간과 노력들을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하지 못해서 아쉬울 때가 많긴 하다.
"엄마"가 희생의 대명사라는 믿음도 옅어지진 않았다. 우리 엄마의 그런 희생 덕분에 내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잘 성장할 수 있게 되었고, 나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가족들에게 크고 작은 희생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희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내가 희생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 희생을 통해서 결국 내가 얻은 게 더 많기 때문이다.
내 입으로 맛난 게 들어갈 때엔 그냥 좋을 뿐이었지만, 아이들의 그 작은 입으로 내가 만든 음식이 들어가서 조물조물 씹히는 걸 보면 그 뿌듯한 기분은 말로 다 풀어내기 힘들 지경이었다.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분이 좀 상하고 말았지만, 누가 내 딸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을 명예훼손죄로 고발을 해서 끝내 형사처벌을 받게 하고 싶었다. 누구의 잘못도 없었지만 아이가 아프게 되었을 때엔 나의 한계를 절감했고 절대자에게 꼬꾸라져 나의 모든 것을 드리더라도 내 아들의 건강을 찾아오고 싶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느끼는 감정은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감정들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그것들을 만나게 된다. 기쁨, 슬픔, 흥분, 놀람, 분함, 좌절, 경외, 감사하는 마음 등등이 내 자식과 연결되었을 때에는 한 층 깊이가 더 해졌다. 과연 우리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이런 경험들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까?
딸과 아들을 키우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우리 엄마의 수고와 노력에 대해 더 감사할 줄 알게 되었고, 우리 부모님의 선택과 삶도 한껏 더 존중하게 되었다. 어디 우리 엄마에 대한 생각만 바뀌었나. 거친 아줌마 아저씨들, 그니까 세상 모든 엄마와 부모님들이 정말로 대단해 보였다. 어떻게 생색 하나도 안 내고 이런 일들을 묵묵히 해 올 수 있었을까? 타인에 대한 존중도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고 다른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육아를 통해서 겸허히 배우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나를 가장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한 인간으로 더 한 층 성장시켜 준 아이들,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조금 더 체험할 수 있게 허락해 준 시간들, 겸허하게 하나님을 더 생각할 수 있게 해 준 환경들에 대해 더없이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조심히 이야기해 본다.
아이들 낳고 기른다는 건 당신의 삶을 다른 차원으로 성장시켜 줄 놀라운 일이라고. 희로애락뿐만 아니라 모든 좋고 어려운 감정의 깊이를 몇 곱절이나 더해줄 신비로운 일이라고. 한번 사는 인생에 이런 좋은 경험은 또 없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