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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다시 밴쿠버에서 혼자가 되다

밴쿠버와의 두 번째 만남

by 은종
랭리 근처 몰에서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밝게 빛나는 초승달


2011년 다시 밴쿠버. 그리워서 6년 만에 돌아와 혼자만의 첫날.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갔습니다. 다시 모든 게 낯설었죠. 한국에서는 기름을 넣으려면 그냥 차만 갖다 대면 되었습니다. 주유소 직원이나 주인이 다 해줬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곳은 달랐습니다. 주유소에 딸린 가게에 가서, 기름 대금을 먼저 지불하고, 스스로 주유를 하고 가는 시스템이었죠.(한국도 밴쿠버도 이제는 많이 변했습니다.)


'아! 이제 이 모든 걸 혼자 해야 한다는 말이야?'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갑자기 막연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해? 내가 선택한 삶이쟎아.'


그랬습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었죠. 하루에 전화를 50통이나 주고받아야 하는 그런 분주함으로부터, 잠들지 못하는 도시의 네온사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떨리는 내 오른쪽 눈의 경련을 멈추게 할 평온의 땅이 절박했던 터였죠. 떠나와야 했습니다. 불필요한 것, 꼭 필요하지 않은 것, 없어도 크게 상관없을 것들을 털어내고 싶었죠.


"머리를 열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몇 개월간의 심한 눈 떨림으로 입원을 하고 기적 같은 치료를 기대하고 찾아간 병원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예상 밖의 대답을 들었을 때, 말 못 할 설움이 몰려왔습니다.


"열심히 산 것 밖에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정말 열심히 산 것 밖에 없는데,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이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죠. 그러면서 일순간 살아온 지난날들이 떠오르며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문제는 멈추지 않는 것이었죠. 병원이 떠나갈 듯 울었습니다.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설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감춰왔던 외로움과 설움이 겹쳐 한 밤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었더니 정신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들었을지도 몰라. 이제 그만 울어야 해.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된다는 거야. 그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해.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


뭔가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었죠. 휴직을 결심하고 모든 걸 내려놔야 했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도 포기해야 했고, 하던 일도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나를 비워내야 했죠.


결국 그렇게 털어내고 보니, 나 자신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밴쿠버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로 했죠. 태평양너머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겁니다. 드넓은 바다 위의 창공을 가로질러 지구 반대편 저쪽에 닿을 즈음이면 내 마음에 남아있던 찌꺼기들까지 떨어져 나가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었죠.


공항에 앉아있는 내 마음이 이상했습니다. 평소에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담담함. 맛으로 치면 무맛이었습니다.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죠. 기다리는 사람도 보내주는 사람도 없는 공항에 혼자 비행기를 기다리는 그 마음. 순간 마음이 텅 비어 버렸습니다. 거기엔 어떤 기대나 바람,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죠. 그저 비행기가 시간 맞춰 오면 그냥 몸을 실으면 되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지쳐있었고, 눈이 너무 심하게 떨렸고 심지어 자는 동안에도 떨리니까 의욕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머리에 구멍을 뚫고 싶지도 않았고, 언제 어떻게 나을지도 모르는 이 떨림을 안고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모든 걸 잊고 쉬고 싶었죠.


그렇게 시작된 낯선 땅 밴쿠버에서의 삶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ESSO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며 현실로 느껴졌습니다. 다시 혼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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