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3. 내가 분명 다른 세계에 오긴 온거야

밴쿠버 도착 첫날의 문화 충격,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해변 풍경

by 은종
다운로드 (5).jpg 해변 내려가는 길, 겨울이어도 밴쿠버는 온난해서 초록이 무성하다


새로운 세상으로 왔으니 궁금하기도 하고 동네 한 바퀴 돌아볼 겸 대충 짐을 풀어놓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한 겨울인 한국과 달리 밴쿠버는 온통 싱싱한 초록이었죠. 싱싱한 보스턴 고사리 잎들이 해변으로 내려가는 산책로에 가득했습니다. 상쾌한 바람과 신선한 초록의 숲에 들어오니 여독이 풀리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죠. 얼마 내려가지 않아 해변으로 떠내려온 큰 나무둥치들과 자갈밭이 보이면서 툭트인 바다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 내가 드디어 밴쿠버에 왔구나." 비로소 설렘과 기대가 가슴을 채우며 심장이 뛰었습니다. 마치 새로운 피가 온몸을 도는 것처럼 기분이 한결 좋아졌습니다.


코너를 도는데 신기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얗게 빛이 바랜 고사목 나무 둥치에 비스듬히 기대고 해변에 드러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죠. 등산화를 신었지만 옷을 입지 않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죠. 이곳이 말로만 듣던 그 '누드 비치' 였던 겁니다. 눈이 마주쳤지만 보는 내가 어찌할 줄 모를 뿐 보이는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읽던 책을 계속 읽어나갔죠. 어떻게든 그 장소를 벗어나 앞으로 빠르게 걸어가는데 또 다른 광경에 시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당황했죠. 이번에는 등산화를 신고 백팩을 메었지만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걸어오는 사람들을 본 겁니다.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죠. 단지 옷만 걸치지 않았을 뿐 평소와 다름없이 자연스럽게 산책하는 그들이 한국이 아닌 이국임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내가 분명 새로운 세상에 오긴 왔구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지만 마음은 이미 크게 놀라고 있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에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입구로 들어오면 한 여름에는 거의 수백 명이 누드 상태로 직사광선을 즐기는 캐나다에도 많지 않은 누드 비치로 유명한 뤡 비치(Wreck Beach)였던 겁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죠. 계절이 바뀌며 뤡비치의 진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풍경이 해변가에 펼쳐지죠.


처음이 문제지 점점 익숙해졌죠. UBC 유학생들과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자연스럽게 즐기게 되었으니까요. 이곳에서의 옷은 옵션이었습니다. 입어도 되고 안 입어도 상관없는 거죠.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면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지죠. 해변가 바위 위에 빛을 더 받으려고 은빛 막을 두르고 많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앉아있는 풍경, 혼자서 물구나무를 서 있는 풍경, 어린아이를 포함한 온 가족들이 소꿉놀이하는 풍경, 해 질 녘 노을을 바라보며 기타 치고 춤추는 장면, 모닥불을 피우는 풍경, 달 빛 받으며 바다 저 멀리서 머리를 휘저으며 일어서는 여인의 풍경, 비스듬히 드러누워 책을 읽는 남녀의 풍경.


이 모든 풍경들이 전라의 상태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풍경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옷을 입었다고, 문명을 일구고 살아간다고 해서 동물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도 그저 살아있는 동물이자 생물임에 다름 아니다. 인간만 무슨 특별한 생명인 것처럼 고상한 척을 하며 다른 생명을 경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 사람도 지구 상에 생존하는 많은 동물 중 한 생명임을 자각하고 자연의 일부로 동등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면 우린 옷 속에 많은 것을 가리고 살죠. 신분을 상징하는 옷 속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옷차림으로 사람들은 그저 단정 짓죠. 의사, 간호사, 판사, 경찰, 성직자, 승무원. 특히 성직자들은 일을 안 하는 평소에도 유니폼을 입고 다닙니다. 그 옷으로 자신의 신분과 역할을 표현하죠. 사람들도 당연시합니다. '저 옷을 입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이다.' 막연히 규정을 하죠. 하지만 아무도 모르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뤡비치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의 실상에 대해 의문하게 됩니다. 겸허해지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옷을 걸치지 않은 생명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본능과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서 지켜야 할 존엄과 품위는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나. 그 바다를 산책할 때면 늘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쉽게 답을 얻을 수 없으니 그저 의문만 깊어졌죠.


사람들은 본인의 경험 속에 갖혀 삽니다. 자기가 모르는 세계는 없다고 생각하죠. 없는 게 아니라 모른다고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밴쿠버에서의 삶에 슬슬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죠.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지.

keyword
이전 02화02. 끈이 떨어진 느낌, 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