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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마치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UBC 유학생과 교수님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by 은종
다운로드 (2).jfif 5월이면 장미향이 가득했던 UBC 로즈 가든


UBC에서 만난 유학생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각자 전문분야가 있었죠. 버스 타는 법에서부터 밴쿠버 살이에 대한 소소한 정보를 꼼꼼히 알려주던 친구, 장 보러 갈 때마다 일일이 의견을 물어 대신 물건을 사다 주거나 동승해서 데리고 다니던 친구, 맛난 요리를 하면 꼭 초대를 해서 맛을 보여주곤 했던 친구. 마치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가족같이 대해주던 유학생들이 있었죠.


바쁜 의대 생활을 하면서도 주말이면 꼭 춤을 추러 가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식사를 할 때에는 수입이 더 많은 사람이 내는 것을 원칙으로 살고 있다면서 자기가 가장 수입이 많다며 늘 자기가 밥을 샀던 친구도 있었죠. 전공도 제각각이고 저마다 다른 지역에서 왔지만 타국에서의 유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가족이 되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이 같지가 않았죠. 마치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서로를 도우며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밴쿠버에 도착한 다음날 그들과 함께 린 캐년에 가기도 했죠. 밴쿠버 한인 산우회 사상 시차도 없이 도착 다음날 산에 오는 사람은 처음 봤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우리는 만나자마자 바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같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그 날 그 날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던 포닥 유학생이 들뜬 모습으로 방에 찾아왔죠. 바로 인권운동가이신 사노맹 활동으로 옥고를 치른 백태웅 교수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살아있는 전설을 직접 만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흥분해서 이야기했죠. 그 인연으로 저 또한 법학과 수업을 참관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도 가졌습니다. 한국 대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자유롭고 활발한 쌍방향 수업방식이 참 인상적이었죠.


노블레스 오블리주. 더 가진 자의 도덕적 책무가 당연한 듯 보였습니다. UBC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덕목이었죠. 유학생들은 어떻게든 상대방의 시간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먼저 알게 된 정보는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일. 서로가 성장할 수 있는 아름다운 태도죠. 교수님들도 권위적이지 않고 학생들과 협업하는 파트너로서 자상하고 친절하셨습니다. 심지어 밥도 잘 사주셨죠.


한번은 영어가 너무 늘지 않아서 세인트 존스 기숙사생 전체에게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영어 튜터를 구한다고. 여러 명이 지원을 해왔죠. 그 가운데 크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에게 회신을 했습니다. 방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영어공부를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 여학생을 고른다고 고른거죠. 그런데 이게 왠걸. 약속한 당일 나타난 학생은 키가 족히 180cm는 넘어 보이는 깡마른 남학생이었습니다. 크리스는 크리스토퍼의 준 말이고 보통 남자 이름이라는 걸 저만 몰랐던 거죠.


이렇게 만난 크리스는 심지어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자기도 어릴 때 일본 생활을 해봐서 외국어를 배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그냥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고 싶다는 거죠. 순수한 선의로 만난 사이라 금방 가까와졌고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 큰 키로 산책길에 높은 가지 끝에 까맣게 익은 블랙베리도 잘 따주고, 간혹 마운틴 레인 젠도에 명상을 하러 가기도 하면서 생활 영어를 배웠죠. 삼계탕을 좋아했던 크리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가끔 안부가 생각나는 친구입니다.


사랑이든 물건이든 받을 때도 행복하지만 줄 때도 참 행복하죠. 이곳 UBC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주는 행복을 잘 아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덕분에 저의 밴쿠버와의 첫 만남은 정말 순조로왔습니다. 그 고마움과 함께 나도 모르게 내 마음 속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았죠. 꼭 돈이 아니어도 우리 모두는 각자가 많이 가진 것들이 한 두가지 쯤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손 재주 일 수도 있다. 초의 불빛은 나누어도 그 빛이 줄지 않고 오히려 밝음이 더해지듯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눌수록 그 가치가 커진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는 일은 이 사회를 보다 아름답게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UBC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앞만 보고 살아오던 제게 옆을 돌아볼 수 있는 고상한 정신을 가르쳐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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