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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Apr 14. 2024

나의 베트남어 노래는 부끄럽다

외국어 덕질 시작하기

흥의 민족이 모여사는 동네가 한국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여기 베트남도 만만치 않은 곳이다. 모든 집집마다 노래방 기계가 있는 정도니까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누구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곳이 베트남인 것 같다. 심지어는 아파트에서 한밤중에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는 집이 있더라도 아무도 컴플레인하지 않고, 동네가 떠나갈 듯 우퍼를 쿵쿵거리며 틀어 놓아도 아무렇지 않은 곳이다. 어느 모임에나 노래가 빠지지 않는다. 회사 창립기념식 자리에서도, 또 어느 종류의 송년회를 가더라도 그리고 무슨 종류의 행사건 상관없이 꼭 등장하는 것이 노래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래처를 만나 식사를 해도 노래방 기계가 나와있고, 회사 제품을 설명하는 행사를 해도 노래방 기계가 나온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노래방 기계가 나오는지 신기할 일이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집집마다 노래방 기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요즘에는 고출력의 스피커에 블루투스를 연결해서 부르면 되는 기계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편이고, 우리 회사 강당에도 하나가 놓여있다. 필요하면 동네 어딘가로 전화를 해서 배달을 시킬 수도 있는 베트남에선 매우 일반화된 기계이다. 실제로 시골 출장 중에 논두렁으로 노래방 기계를 배달시키자 오토바이에 실어서 가져다주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 모두가 빼지 않고 노래 몇 곡쯤은 할 줄 알아야 한다. 회사 행사를 하면서 나에게도 노래 신청하라고 해서 '뭘 부를까?' 하며 조금 고르고 있다 보면, 이미 많은 직원이 예약을 걸어놔 내 차례를 30분 이상 기다려야 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이런 식으로 베트남에서 살려면 노래 몇 곡 정도는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난 회사의 대표다 보니 여러 행사도 많고, 노래 요청도 그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다. 우선은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 노래를 불러본다.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은 내 또래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아무래도 최신곡보다는 90년대 2000년대 감성의 한국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한국 노래로 몇 차례 행사를 치르다 보니, 베트남 노래는 안 하냐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표님도 이제 베트남 노래 하나 정도는 배우셔야죠."라며 은근히 압박을 해왔다. 그래서 통역 직원을 통해 배운 노래가 있는데, 한국인이 따라 부를 수 있는 정도로 느린 노래였고, 출퇴근 길에 차 안에서 여러 번 따라 하다 보니까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처음 그 노래를 부르던 신제품 발표 행사날, 이 노래를 알려주었던 베트남 통역 직원의 도움을 통해서 무사히 노래를 마치고 행사장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행사장 각 테이블의 화병에 꼽혀있던 꽃 장식을 노래하는 나에게 전달해 주어서 나중에는 거의 꽃다발을 들고 노래를 마치게 된 정도였다. 이때 배운 베트남 노래는 베트남의 국민가수 정도되는 미땀(Mỹ Tâm)이 부른 욱지(Ước gì, 원해요)라는 노래이다. 이후에는 이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서 베트남 직원이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 무대에서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가사 마지막 단어를 바꿔서 회사 이름을 넣는다던지, 제품명을 넣어서 부를 수도 있게 되었다.


욱지(Ước gì)를 부른 가수 미땀(Mỹ Tâm); 약 6년 전쯤 이 가수의 공연을 본 적이 있고, 그래서 둘이서 사진도 같이 찍었으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네요.


최근 수년간 내가 할 수 있는 베트남 노래는 오직 이 노래, 욱지(Ước gì)였다. 회사 행사를 하다가도 노래 부르는 시간이 되면 직원들이 알아서 이 노래를 선택해 놓고 날 불러냈고, 거래처를 만나도 이 노래 반주와 함께 날 일으켜 세웠다. 노래도 느리고 멜로디도 쉬워서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긴 했고, 자주 부르니 뜻은 몰라도 가사를 거의 외워버리는 정도까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트남어 공부가 시작되며, 이 노래의 가사가 궁금해졌다. 한 줄씩 번역을 하며 한국말로 읽어나가기 시작하면서 난 조금씩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빠와 떨어져 지낸 지 며칠이 지났지만, 몇 년이 된 것 같아요. 난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내 사랑...... 난 항상 오빠를 그리워하고, 나에겐 오빠 밖에 없다고 말할 거예요." 이런 뜻이 있는 가사였다. 뜻을 모를 때는 그냥 불렀는데, 알고 나니 오글거려서 부를 수가 없게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겐 노래를 부르는 내가 외국인이라서 무관심할 수도 있지만, 가사의 뜻을 알고 나니 왠지 남자가 여성스러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한 뚝배기 하실래예?"를 외치던 '로버트 할리'가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 같은 노래를 부르면 웃길 것 같단 생각이 들었고, 내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노래를 하나 더 찾았다. 그동안 늘 부르던 욱지(Ước gì)라는 노래보다는 조금 어렵긴 한데 남자 가수 노래고, 그래서 가사에 불만은 없다. 


요즘엔 '사랑은 용서입니다.'라는 뜻의 베트남 남자가수 'Only C'의 노래 '이우 라 타투(Yêu Là Tha Thu)'를 연습하고 있다. 카페에서 듣고 괜찮은 것 같아서 유튜브로 바로 검색해 보았는데, 2017년 노래이고 유튜브 조회수가 1억 5천만 회를 넘는다. 역시 거의 1억이라는 베트남 인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인기곡이면 1억 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영상을 보고 몇 차례 시도해 봤는데 가사가 많아 힘들긴 하지만, 계속 듣고 연습한 뒤에 이제는 따라 부르는 것이 조금 가능해졌다. 최근 며칠간 베트남어 공부를 하다가 이 노래 가사도 한 번씩 써보며 익히고 있는 중이다. 베트남어 공부를 하고 있어서 조금은 더 익히기가 수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오글거리는 가사가 없어서 당당히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될 것 같고, 이제 곧 데뷔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언어를 배우면 그 나라의 문화를 함께 익히게 되는 것 같다. 심지어 언어 자체에 그 나라의 문화가 다 들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저 노래의 분위기가 좋아서 무작정 따라 부르는 것도 가능한 일이고, 지금까지는 그런 식으로 팝송과 같은 음악을 많이 듣기도 했지만, 이제는 베트남어의 학습자로서 그 단계를 넘어서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쉽게 말해 덕질이 시작되는 단계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어학당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에게 노래 좀 알려달라고 해야 되겠다.



https://youtu.be/-nnWBhKZeg0?si=vyj88DebxK1Kg9fJ

요즘 연습하고 있는 베트남 노래 Yêu Là Tha Thu(사랑은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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