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돌 Apr 07. 2024

어학당의 먼지밥

우연이 이끄는 삶

퇴근길이 막혀서 시계를 보니 시간이 조금 애매하다. 집에 다녀오기에는 늦을 것 같고, 직접 어학당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빠른 것 같다. 원래 계획으로는 퇴근 후 집에서 저녁을 먹고 어학당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그렇게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들이 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 오늘이 그렇다. "난 집에 가지 않을 거야, 레탄톤으로 가자(Sếp không đi về nhà, đi Lê Thánh Tôn đi)." 집으로 차를 몰고 있는 운전기사에게 베트남어로 경로를 변경해 달라는 말을 했다. '레탄톤'은 호치민에서 유명한 시내 한복판의 거리인데, 다른 말로는 일본 거리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길거리에는 온통 일본 식당들이 즐비하고, 관광객이 늘 북적거린다. 그리고 내가 다니는 어학당도 이 근처에 있다. 이것저것 애매한 오늘은 레탄톤 거리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어학당으로 가야 되겠다.


레탄톤 중심의 길가에 차를 대고 내려서 골목으로 걸어 들어간다. 사람들과 오토바이가 함께 인도를 이용하고 있고, 식당과 마사지 가게 종업원들은 길거리에서 손님들에게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저녁 6시가 다되었는데도 주황색의 태양은 여전히 거리를 비춘다. 아마 아직도 30도를 넘는 온도일 것이다. 난 검은 정장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인중과 이마를 한번 닦아본다. 차에서 내려 100미터 정도를 걷는 동안 아오자이를 입고 호객행위를 하는 열명도 넘는 사람들을 무시했다 인사했다를 반복하고 있다.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가게마다 손님들로 가득하다. 라멘을 먹을까 돈가스를 먹을까 고민하며 걷다가 코로나 이전에 자주 다니던 라멘집이 보여서 들어갈까도 했지만, 오늘은 그 맞은편 가게에서 돈가스를 먹기로 한다. 


이 거리에서 유명한 후지로라는 식당의 문을 열자 자그마하고 앳띈 베트남 여자 직원이 일본어로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를 외친다. 난 베트남어로 "안녕하세요. 한 명이예요(Chào em. Chỉ một người thôi)."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말 하기 대회를 한다. 베트남 직원은 계속 일본말을 하고, 나는 계속 베트남말을 한다. 식당 주인이 일본말만 하라고 시킨 건가 싶기도 한데, 이 가게의 신기한 룰이다. 여긴 2.5cm 두께의 돈가스가 주력인 일본 가정식 식당이다. 난 1인용 테이블에 놓인 QR코드를 스캔해서 이 돈가스를 시켰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 맛있게 먹은 것 같다. 난 계산을 해달라는 베트남어인 "띤 띠엔(tính tiền)"을 외치고 1만 원 정도 하는 돈을 내자, 베트남 종업원은 고맙다고 "아리가또고자이마스."를 외치며 출입구 문을 열어주었다.


후지로 식당과 2.5cm 돈까스


맛있는 돈가스를 먹고 나오니 날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아직 수업 시작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았다. 다시 차를 타고 호치민 인사 대학교의 정문에서 내려 어학당까지 걸어간다. 그리곤 어학당 사무실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학당이라 그런지 외국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있다. 이제 저녁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라서 직장을 마치고 온 듯 정장을 입은 서양 사람, 인도 사람,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보인다. 난 한국인과는 다르게 생긴 중국, 일본 사람들을 구분해 보기 시작한다. 이 세 나라 사람들은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다. 옷이 다르기도 하지만, 머리 스타일이나 화장 같은 것이 미묘하게 다른 것 같다. 이런 연습을 많이 한 덕에 제법 잘 맞추기도 하는 것 같다.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말을 하기도 하며 내 앞을 오가고 있고, 학교 매점 앞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오호, 매점이라.' 어학당을 다니며 보기는 했지만,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다른 학생들을 따라 오토바이 주차장 옆에 있는 학교 매점으로 천천히 걸어가 보았다. 사탕수수 주스를 팔고, 반미 같은 빵도 있었다. 학교라 그런지 가격이 싸서, 이미 저녁을 먹었지만 충동적으로 주문을 해버렸다. 내가 시킨 것은 '반미 케밥'이라고 적혀있는 음식이다. 케밥이긴 한데 간식용으로 작게 파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금액이 25,000동에 불과했다. 한국돈으로는 1,300원 정도니까 나름 싼 편이다. 작게 잘린 돼지고기에 상추와 양배추를 넣고 여러 소스를 뿌려주는 과정을 직접 볼 수도 있었다. 함께 먹으려고 음료도 시켰는데, 사탕수수 주스는 다 떨어졌다고 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사탕수수를 직접 착즙 해주는 것인데 이 매점에선 한국돈으로 600원 정도 한다. 대신 350원 정도의 생수를 사서 마셨다.


학교 매점에서 판매하는 반미 케밥


천 원짜리 음식치고는 고기도 제법 들어가고 빵도 컸다. 소스가 여러 가지 많이 들어가서 단짠단짠 한 음식이긴 했지만, 시켜 먹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까 먹은 돈가스보다 10배 싸지만, 맛은 10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다음에 또 와야 되겠다.'라며 매점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때는 출근하다가 길거리에서 이런 음식들을 많이 사 먹었는데, 요즘은 거의 먹지 않는다. 상한 길거리 음식을 먹고 한참 고생했던 적이 있어서 그러긴 했는데, 이런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당시에는 이런 음식을 지칭하는 말이 따로 있는지 몰랐었는데, 어학당의 타오 선생님은 이런 싸구려 길거리 음식을 베트남에선 '껌부이(cơm bụi)'라고 부른다며 알려주었다. 직역하면 먼지밥인데, 길거리의 매연과 먼지가 가득한 곳에서 만들어지는 싼 음식이라서 이런 단어가 생겼을 것이다. 수업에 들어가서 타오 선생님에게 나는 오늘 먼지밥을 먹었다고 근황 토크를 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먼지밥을 기억하고 있었냐며 칭찬의 의미가 있는 웃음을 보내주었다. 


계획에 없던 일을 할 때 생기는 소소한 경험이 있다. 오늘 차가 막히지 않았다면, 학교 매점에서 이런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닌가?' 어학당에 다니겠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차가 막히더라도 그냥 집으로 갔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시내에 나와서 오랜만에 돈가스를 먹지 않았을 것이고, 학교 매점에서 먼지밥도 먹지 않았을 테지. 계획과 우연으로 나의 인생이 쌓여가고 있다.

이전 07화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in 어학당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