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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Apr 28. 2024

베트남어로 쓰는 일기

베트남 생활인의 일상

이번주에 어학당에서 내 준 숙제는 베트남어로 일기를 써 오는 것이다. 300 단어 내외로 써야 하는데, 막상 일기를 쓰려고 하니 별로 할 얘기가 없고, 내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와 문장이 너무 단조로운 것만 같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 회사에 갔다. 오전 회의와 자료 정리 이후에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뭐 이러한 내용이 생각나긴 하는데, 사실 이 문장도 베트남어로 쓰기에는 버겁다. 어쨌든 이 정도면 15 단어 정도가 되니까 이런 문장 20개 정도 쓰면 될 것 같기는 하다. 한국어로 일기를 써 본 적도 꽤 오래되었는데, 베트남어로 써야 하다니... 하긴 한국어로 쓴다고 한들 뭐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일단 책상에 앉아 연습장에다 한국어로 몇 개의 문장을 더 만들어본다. 이번엔 이 문장을 내가 배운 베트남어 안에서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하고, 번역기를 돌려서 문장이 맞는지 확인을 해본다. 시간을 들이면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 한번 써보자.'


여기 베트남에 살고 있는 나의 일상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최근 열흘 정도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거의 대부분의 날이 비슷한 것 같다. 아침 6시 30분 정도에 일어나고, 아파트 1층의 한국 사장님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나와서 회사로 가는 차에 올라탄다. 검은색 카니발인데 뒷자리에 앉아 창밖의 길거리 카페와 오토바이 행렬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또는 전자책 리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잠을 자기도 한다. 일상적인 회사 업무를 마치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며 출근할 때의 행동을 반복한다. 요즘은 내가 있는 베트남 남부 지역이 일 년 중 가장 더운 기간이다. 건기에서 우기로 넘어가기 직전인 요즘이 가장 더워서 38도 근처까지 온도가 오르기도 하는데, 얼마 전엔 골프를 치다가 더위를 먹기도 해서 며칠 고생을 한 적도 있다. 그래서 퇴근시간에는 늘 비를 기다리며 차창의 햇빛가리개 뒤로 비치는 노란색 태양과 비가 담겨있을 것 같이 뚱뚱해진 구름을 바라보기도 한다.


퇴근 후에는 본격적인 나의 개인 생활이 시작된다. 최근에는 거의 술 마시는 약속을 잡지 않기 때문에 달리기 연습을 하거나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면서 유튜브를 보기도 한다. 달리기는 지난해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재미를 붙인 것 같다. 동네의 내가 좋아하는 코스를 달리거나 아니면 헬스장의 트레드밀 위에서 가볍게 달리는 정도를 하고 있다. 올 7월 베트남 중부지방인 다낭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하프코스 참가 신청을 해놨기 때문에 5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다시 연습을 하려고 마음을 먹은 상태다. 한편, 요즘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인 김석훈의 쓰레기 아저씨를 보면서 언젠가 나도 베트남에서 저런 활동을 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베트남이라는 나라는 슬적보면 예뻐 보이지만 사실 온통 쓰레기 천지다. 비닐봉지, 각종의 플라스틱 용기, 담배꽁초 등, 베트남 길거리를 자세히 보면 언제나 쓰레기가 있다. 나중에는 베트남 정부도 이런 쓰레기에 대한 캠페인을 하겠지만, 아직은 이런 것보다 경제 발전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그리고 내가 가장 기다리는 주말, 주말 아침엔 종종 집 근처의 쌀국수 가게에 가서 소고기 쌀국수를 먹는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먹는 것 같은데, 북부식, 남부식 쌀국수를 번갈아가며 먹어보기도 하고 또는 아예 다른 종류의 베트남 면 요리를 시켜 먹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늘 출근하며 이용하는 아파트 1층의 카페에 앉아서 글을 쓰기도 한다. 이 글도 그 카페에 앉아 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곤 와이프와 장을 보러 가기도 하는데, 가끔은 한국과는 다른 물건들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 보관하기도 한다. 특히 과일과 채소가 예쁘게 보인다. 어디 공개하는 건 아니고 그냥 보관만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주말이 다 지나버리고 만다. 주말 저녁의 마지막 코스로는 와이프와 동네 산책이 하나 남아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월요일 아침을 애써 외면하며 공원길을 걷는다. 학생 때부터 중년인 지금까지도 월요일 아침은 늘 기다려지지 않는다.


나의 산책 코스 겸 달리기 코스인 동네 호수 공원


이런 정도의 일상을 간단히 요약해서 쉽게 베트남어로 쓰면 숙제가 완성될 것 같다. 이젠 A4 용지에 연필로 쓰고 또 지우며를 반복하면서 일기를 완성해 본다. 뿌듯하다. 회사에 갈 때 들고 다니는 백팩에 집어넣고 다음번 수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회사에서도 다시 꺼내놓고 몇 개의 문장을 다듬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회사의 회계매니저가 내 방에 들어왔다. "법인장님, 오늘 세무서 공무원과 만나야 될 것 같습니다."


나의 숙제가 소용없게 되었다. 베트남 세무 공무원과 갑작스러운 약속이 잡혔기 때문에 어학당의 수업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래는 숙제를 제출해야 했던 수업일 저녁에 만난 베트남 공무원은 나에게 세무조사 얘기를 하다가 상당한 액수에 대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난 머리가 복잡하기만 하다. 그 공무원과의 미팅 이후로 이번주 내 일상은 다 깨져버렸다. 이에 대한 스트레스로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은 아예 할 수도 없고,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원래 있었던 약속도 모두 취소해 버렸다. 온통 세무 공무원과 세무조사, 그리고 이를 막을 돈에 대한 생각만 머리에 가득하다.


요즘 들어 매일같이 새벽 기도를 다니고 있다. 내가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며 기도를 하고 회사로 출근을 한다. 그리고 매일같이 베트남 세무서에 대한 대책회의를 하고 자료를 만들면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또 세무 공무원을 만난다. 나의 평범하던 일상은 다 사라졌다. 세무서에서 제시한 마감 기한이 다가오며 이를 감당해야 할 나, 그리고 내가 가진 선택지들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의 잠자리에 들기를 여러 날 반복하고 있다. 그러다 일기를 쓰며 생각했던 나의 평범하던 일상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 단조로운 일상이 행복이었던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힘들다. 나의 평범하던 일상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하는 때가 되었다. 결국 부딪쳐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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