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돌 May 26. 2024

밥 잘 먹고 옷 잘 입으면 부자인가요?

정확한 내가 되기 위한 비교급

약 2주 만에 어학당에 출석했다. 그 사이에 세무조사를 받으며 공무원들과 협상하느라 몸은 2달치, 아니 2년 치 정도는 늙어버렸을 것이다. 이제 막 조사가 끝나서 아직 몸이 피곤하지만, 그래도 수업에 나오기로 결단한 스스로를 칭찬하며 오랜만에 어학당으로 향했다. 어학당의 안내판에는 3층이라 적혀있지만 실제로는 5개의 층에 해당하는 계단을 빠르게 뛰어오르느라 숨이 가쁘다. 이미 수업에 15분 정도 지각한 상태라서 어학당의 느려터진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뛰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실 문을 열기 전에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선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내 어깨너비만큼 열린 문 틈으로 몸을 밀어 넣자, 교실의 학생들이 베트남어로 "안녕. 오랜만이야.(Xin chào, Lim. lâu rồi không gặp.)" 그리고 "헬로.(Hello.)"를 외치며 한참 진행 중이던 수업을 중단시켰다. 오랜만에 보는 학생들 마이크, 닉, 엘레나와 히로가 앉아있었다. 까밀로는 결석을 하는 모양이다.


내가 검은색 백팩을 책상 옆 바닥에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잡아당겨 앉자마자, 배꼽이 거의 보일만큼 짧은 티셔츠를 입은 타오 선생님은 그동안 왜 결석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세무조사 때문에 너무 바쁘고 힘들었다.(Anh rất bận và mệt vì việc kiểm tra thuế.)"고 말을 하니, 선생님은 "세무 공무원들과 맥주를 엄청 마셨겠네요."라며 나의 고충을 이해하겠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세금을 더 깎을 수 있다면, 맥주는 더 마셔도 괜찮아요.(Nếu anh có thể giảm thuế được, anh có thể uống bia hơn.)"라고 대답했다. 내가 이 모든 말을 베트남어로 하다니, 새삼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타오 선생님은 내가 세무조사 기간 동안 베트남의 세무 공무원들과 술을 많이 마셨을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베트남의 세무조사는 으레 이런 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인 것 같다. 홍콩에서 온 마이크는 같은 동양문화권이라서 그런지 날 보며 공감한다는 뜻으로 웃어주었지만, 베트남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고 있는 캐나다인 닉은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 아마 그는 베트남에서 세무조사를 받아보지 않았거나 또는 이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세금을 정확히 계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계를 어떻게 맺으며 문제를 풀어가는지도 중요한 것이 이곳의 공무원을 상대하는 문화인 것 같다. 이와는 별개로 여기 세무공무원들은 조사 몇 번만 나가면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베트남에서 벌써 세 번의 세무조사를 받았다. 한국에서도 여러 번 받아보았지만, 베트남에서의 경험은 다른 것이었다.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말과 생각이 따로 있다. 별말이 없어도 그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처음 이곳에 와서 세무조사를 받을 때는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준비했는데, 베트남 직원들이 나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곤 했었다. 이젠 반대로 베트남에서 받은 세무조사를 한국 본사에 설명하며 이런 느낌을 받는다. 내가 제대로 설명해도 한국에선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베트남 사람인 타오 선생님은 내가 세무조사를 받았다고 말만 해도 척하고 알아듣지만, 닉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요즘 들어 새삼 단어가 같다고 다 같은 뜻이 아니란 것을 느끼고 있다.

오늘 베트남어 수업에선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비교급, 최상급이 나오는 문장들을 공부한다. 신발 한 켤레를 사면서 주인이랑 흥정하며 서로 면박주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역시 베트남 사람들답게 교재에도 웃음거리를 집어넣어 놓았다. 오늘의 수업뿐 아니라 어학당 교재에 있는 대부분의 예문에는 웃기는 장면들이 하나씩 들어있다. 오늘은 주인이 부르는 가격에서 일단 1/3을 깎고 시작하는 손님과의 대화가 나오고 결국에는 구두에서 슬리퍼로 흥정대상이 옮겨지며 끝나는 예문으로 되어있다. 서로 흥정만 하다가 사지도 팔지도 않는 상황으로 끝난다. 이제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이를 활용하여 서로 문장 만들기도 했다.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비교급에는 '~보다 더'라는 '헌(hơn)'이라는 단어를 써주면 되고, 최상급에는 '최고'라는 뜻의 '녓(nhất)'을 넣어주면 끝나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이를 이용해 예문을 만들던 우리는 늘 운전기사가 교문에서 대기하고 있는 홍콩인 사업가 마이크가 제일 부자라며 그에게 부유함의 최상급 타이틀을 주었다. 반대로 늘 그랩(Grab) 오토바이를 불러야 하는 일본인 히로는 제일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가끔 운전기사가 나오기도 하고 대부분은 택시를 타고 다니는 나는 그들 중간에 있는 어떤 사람이 되었다. 부자의 조건이 베트남에서 차량을 소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운전기사가 있는지 여부로 결정되었다. 부자였다가 가난뱅이였다가, 그렇게 비교 대상에 따라 처지가 바뀌게 되었다. 우리의 대화 주제가 부자와 가난뱅이로 모아지자, 타오 선생님은 부유함와 가난함의 이야기를 하며 베트남에서 유명한 말을 소개해 주었다.


"예전에 베트남에서는 안짝막벤(Ăn chắc mặc bền)이라는 말을 자주 썼어요. 베트남이 엄청 가난했을 때 자주 쓰던 말인데, '밥을 든든히 먹고, 옷을 튼튼히 입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너무 못살았기 때문에 그랬는지, 맛있는 것 여부는 상관없이 든든히 배만 채우면 되고, 예쁜 옷인지는 상관없이 찢어지지 않고 튼튼한 옷 한 벌만 있으면 괜찮다는 식으로 쓰던 말이고 다들 이렇게 살면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이런 말을 잘 쓰지 않아요. 베트남 경제가 조금씩 좋아지면서 잘 산다는 기준도 변한 것 같네요. 요즘엔 다들 맛있는 거 조금씩 자주 먹고 튼튼한 건 상관없이 비싸고 예쁜 옷만 입으려고 하잖아요."



베트남에 처음 와서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뭐가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친하다고 생각하던 한 베트남 직원에게 물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괜찮은 마사지 가게가 어딘지 알아?" 주말에 집 근처에서 마사지를 받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퇴근하려 사무실을 나서며 자동차를 타러 가다가 마주친 통역 직원에게 물었던 것이다. "아니요, 저는 그런 부자의 삶은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간단한 대답이었는데,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생각이 났다. 일반적인 한국 직장인으로서 2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누리는 마사지 서비스는 별 것 아닌 평범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베트남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에게는 부자가 누릴 수 있는 서비스였던 것이다. '그 통역 직원에게는 내가 부자로 보였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내가 가치를 두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고, 누구와 비교를 하는지에 따라 나는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뱅이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살고 언어를 배우며 이러한 차이들을 조금씩 더 알아간다. 얼마 전에는 한국에서 출장을 나온 후배가 밥을 먹으며 이런 말을 했다. "법인장님, 저는 언젠가 꼭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한번 돈 많이 벌어서 멋진 스포츠카도 사보고, 건물 임대료도 받으면서 살아보고 싶어요." 난 그 후배에게 내가 처음 베트남에 나왔을 때 마사지샵을 묻는 나에게 대답해 주던 베트남 직원의 말을 해주었다. "누가 보기엔, 넌 이미 부자일 수도 있어."

이전 11화 악보를 보듯 글자를 읽어보아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