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chid Oct 12. 2023

 그리움을 담은 밥의 풍경화: <밥정(밥情)>

<밥정>은 전국 방방곡곡을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자연에서 나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이끼, 나무껍질, 잡초조차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음식으로 만들고 대접해왔던 요리 연구가 임지호 셰프의 자전적 다큐멘터리이다. 사계절이 풍경화처럼 담긴 서정성이 가득한 이 영화는 눈 덮인 산, 거친 눈바람 속을 걸어 올라가며 40여 년 동안이나 식재료 찾으려고 세상천지를 떠돌아 다녔다는 임지호 셰프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거친 숨소리가 지나간 세월의 고초를 압축한 듯 하다.

  “자연에서 나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게 없다”며 음식 재료를 찾아 전국을 떠도는 그는 일명 ‘방랑 식객’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가 특별한 것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독특하고 아름답고 맛난 음식을 만드는 셰프로서가 아니라 음식이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정’(情)을 전하는 임지호 셰프의 마음의 그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대접하는 밥 한끼는 단순히 먹는 물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그만의 풍성한 선물이다. 

 그의 방랑은 생이별한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되었다. 친어머니는 아들을 바라던 시골 한의사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지만 가난으로 인해 아들을 아버지에게 남긴 채 떠났다. 그가 어머니의 사연을 안 것은 어린 시절이다. 어른들의 수근거림을 들었던 아이들이 그를 놀리기 시작했고 마음에 상처와 그리움을 안은 열두 살 소년은 집을 떠나 방랑의 길로 들어선다. 

 연륜은 그저 세월이 더해지는 테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지고 마음이 깊어지는 성장의 선물이다. 나이가 들자 그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만큼 그를 가슴으로 키운 양어머니의 애달픈 마음을 알지 못하고 떠나온 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비록 그의 방랑의 시작이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하지만 어린 마음에 헤아리지 못한 양어머니의 사랑을 등지고 떠난 죄의식 또한 그가 진 짐이 되니, ‘방랑’은 스스로가 선택한 고초의 발걸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지상에서 세 번째 어머니를 만난 건 배고픈 그에게 산에서 캐낸 냉이로 된장국을 끓여 밥 한 그릇을 먹인 지리산 할머니와의 인연이었다. 그는 세 번째 어머니로 모시게 된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를 느낀다. 지리산을 들를 때면 그는 지리산의 돌 이끼로 국물을 내고, 평생을 산중에서 살았던 마을 어르신들도 못 먹는 것이라고 손사래를 치던 야생 나물을 넣어 된장국을 끊여내고 씹기 좋게 으깬 두부와 섞어 가마솥에 쪄낸 계란찜으로 상을 차려 동네 어르신들께도 ‘정’(情)이 담긴 밥상을 차려드리기도 하며 지리산의 어머니들을 가슴에 껴안는다. 그리곤 그는 시를 쓴다. “기다림과 그리움의 그 이름 어머니...매일 밥상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식을 바라보노라면 음식을 장식한 야생에서 주운 꽃 한 송이와 나뭇잎, 그리고 음식 밑에 깔린 모난 바윗돌 접시에서도 어머니를 닮은 따듯한 맛이 느껴진다.

  그러나 깊게 패인 할머니 얼굴 주름이 곱다고, 평생 일로 거칠어지고 마디는 굽어진 손이 예쁘다고 그가 보듬고 쓰다듬고 환한 웃음을 나누던 지리산 어머니와의 인연도 끝나게 된다.  어느 비 오는 날 할머니가 떠나신 썰렁한 지리산 빈집에 도착한 그는 세 어머니에게 올리는 제사상을 차린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깊은 산중에 오래 된 작은 나무집. 나무를 태워 가마솥을 덥히고 두 개의 가스렌지 불을 이용해 꼬박 3일 밤낮 동안 108접시의 제사상을 준비한다. 힘이 들면 잠시 선잠이 들고 부스스 일어나 다시 음식 마련을 하기를 삼일. 하늘과 땅, 바다에서 나는 모든 자연의 재료들이 그의 고단한 손에서 빚어지고 구워지고 쪄지고 썰어진다. 마침내 셀 수 없으리만치 오르고 내리던 할머니의 발길이 닿았을 퇴색한 툇마루에 제사상이 차려진다.

  108접시가 불교의 108번뇌에서 연유했다면 돌아가신 세 어머니 모두 이승에서 겪었던 번뇌를 훌훌 벗어나 편안한 저승의 길로 떠나시라는 아들의 간절한 마음이 한 접시, 한 접시의 음식에 담겨진다. 그래서 영화는 한 줄의 시처럼 이렇게 읊조린다. 그의 음식은 ‘그리움으로 짓고 진심으로 눌러 담아 정성껏 차린 한상차림’이라고. 자연이 내어주는 생명이 나의 생명을 살리듯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도 자연에서 구해 지은 이 밥을 드시고 또 다른 생명으로 환생하실까? 그건 누구도 모를 일이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모아 정성을 다해 그날 상을 차리시던 임지호 셰프님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으니 부디 사시는 동안 고단했던 마음, 고단했던 발걸음 이제는 편안히 쉬시기를 기원해본다.  

이전 24화 수몰된 역사를 견디는 사탕 한 알: <스틸 라이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