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민하다고요?

난임 한의원에서 전날 밤에 자리 맡기

by 로에필라
Although the world is full of suffering, it is also full of the overcoming of it.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이겨내는 일로도 가득 차 있다.
-Helen Keller (헬렌 켈러)




경주에서 유명하다는 난임 한의원에 왔다.


'삼신할배'라고 불리는 한의사 할아버지께서 토요일 오전에만 진료하신다고 해서 금요일에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남편이 금요일 저녁에 회식을 하게 되어서 집에 늦게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길을 떠났다.


두 시간 이상되는 운전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는 '희망'이 싹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착해서 보니 너무 많은 의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새벽 1시 30분쯤 도착했는데 대기순서가 32번째이다.

내일 제발 할아버지 한의사한테 진료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벌써 새벽 3시 50분이다.

자야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오지 않는다.


걱정이 커진다.


제발...... 너무너무 임신이 하고 싶다.

간절히 아이가 갖고 싶다.


이번엔 생리 시작하고 온 거여서 산부인과에서 과배란 약을 처방받는 것을 포기하고 한약을 몇 달 복용해 볼 생각이다.


걱정도 된다.

'이러다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한약을 먹고 임신한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임신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도 든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날들을 기대하며 보냈다.

하지만 한 번도 임신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본 적이 없었다.

이젠 기대하지 않는 게 더 정신건강에 좋다는 걸 알게 되었나 보다.

습관처럼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끔 밤잠을 못 이룬다.

임신을 못하는 내가 슬퍼진다.

스스로를 연민한다.


남편한테 미안해진다.

회식 끝나고 피곤할 텐데 집에서 편하게 자지도 못하고 같이 차 타고 경주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

임신이 뭐라고 이렇게 사람 자존감을 떨어뜨리는지 모르겠다.

다른 부분은 다 자신 있다.

특히 남편을 너무 사랑하는데 임신이 자꾸 안 되니 다 내 탓인 거 같고 슬퍼진다.


옆에서는 남편이 평화롭게 자고 있다.

나는 그 옆에서 가끔씩 밤마다 슬퍼한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하고 서러움이 치밀어 오른다.




다음날 아침 9시 30분쯤 접수할 때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 핸드폰 번호를 적었다.

오후 2시 30분쯤 오라고 해서 그 시간쯤 들어갔더니 딱 내 순서가 돌아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진료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갔다.

친절한 미소를 띠고 아드님 한의사님이 자리에 앉아계셨다.


먼저 내 손목을 잡고 진맥을 했다.

손목을 잡자마자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낫다'라고 하셨다.

'체력이 약하고, 피곤함을 잘 느끼는데 일을 할 때는 긴장해서 몸이 힘든 것을 못 느낀다'라고 하셨다.

'예민한 성격'이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 말을 들으면서, 대체적으로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진맥으로 내 성격을 말하지?'

한의원의 진맥이 신기했다.

그 후 남편도 진맥을 했는데 체질상 '야식을 먹으면 안 좋다'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와 여러 가지 질문들도 하시고, 내가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라고 했더니 배란장애를 반영해서 한약을 지어주신다고 하셨다.


진료시간은 5분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핵심적인 이야기들만 해주셔서 짧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한약을 한 달 먹고 나서 임신이 되지는 않았다.

생리 시작하면 한의원에 전화하면 한약을 보내준다고 안내를 받았었다.


한약을 추가로 먹어야 할지 고민했지만 이번 달에는 한약을 복용하지 않을 것이다.

한약을 먹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는 총 3가지이다.


1. 마음 비우고 기다리는 걸 못하겠다.


한약을 복용할 때는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몸이 좋아진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난 주변 사람들의 후기로 한약 먹고 바로 아기가 들어섰다는 이야기들을 들어서 기대가 컸나 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3달까지는 임신이 안되어도 한약을 복용해보려고 했는데 병원을 다니면서 내 눈에 보이는 경과를 내가 직접 느끼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2. 못 먹는 음식이 많다.


한약 복용 시에 커피, 탄산음료, 돼지고기 등등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먹지 말라고 한다.


난 커피와 탄산음료를 좋아한다.


최대한 안 먹으려고 참았지만 못 참고 조금씩 먹긴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면서 죄책감이 조금씩 들었었다.


차라리 한약을 안 먹고 마음 편하게 이것저것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하루 두 번 한약을 먹는 게 힘들었다.


저녁 한약을 먹은 뒤 생기는 문제점:

한약을 마신 후 30분 뒤부터는 영양제를 먹을 수 있다.

문제는 예전에는 저녁밥 먹고 바로 영양제를 챙겨 먹었었는데, 한약을 마시고 쉬다가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다시 영양제를 챙겨 먹지 않게 되었다.


아침 한약을 먹은 뒤 생기는 문제점:

난 아침에 이불속에서 미적대다가 씻고 출근을 했었다.

보통 아침밥을 챙겨 먹긴커녕 출근길에 차에서 두유를 마시곤 할 정도로 아침잠이 많다.

그런데 아침에 간단하게 먹고 따뜻한 한약을 천천히 마셔야 돼서 20분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1분이라도 더 자고 싶은데 한약 먹으려고 일어나느라 아침 행복도가 줄어든 기분이었다.




다시 또, 임신을 향한 마라톤을 시작한다.

중간에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꼭 완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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