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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에필라 Jan 15. 2023

포기를 모르는 여자지

인공수정 후 질정 넣기

과배란주사를 맞으면 몸의 호르몬이 불균형해지기 때문에 인공수정이 끝난 후에는 자궁벽이 두꺼워지는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이 들어간 질정을 넣게 된다.


배란 후 자궁벽이 두꺼워지며 임신을 준비하는 현상조차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영화 <가타카> 유전자조작 임신과정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말도 안 돼'하면서 몰입해서 봤었는데 자연임신 과정이 아니라는 점은 비슷한 것 같다. 다른 점은 나는 열성유전자를 제거하려고 인공수정을 하는 게 아니라 자연임신이 잘 안 되어서 인공수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질정은 2주분을 처방받았다.



약국에 갔더니 약사선생님께서 질정을 넣어본 적이 있냐고 물으셔서 없다고 했더니 질정 넣는 것을 도와주는 어플리케이터와 그림설명서를 주셨다.


질정은 한 번도 써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유튜브로 질정 넣는 법을 보고, 난임카페에서 질정 넣는 팁에 대한 글을 검색해서 예습했다.


질정을 넣는 일반적인 자세는 변기에 한쪽 다리를 올려서 넣는 방법인 것 같다.

나도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쪽 다리를 올리고 어플리케이터와 손가락을 이용하면서 방법을 터득해 갔다.

운전을 몸으로 터득하듯이 질정 넣는 방법도 하다 보니 터득이 되었다.


아침과 저녁에 질정을 넣으면 적어도 30분 정도는 누워서 흡수가 되길 기다려야 한다.

질정을 넣으면 체온에 하얗게 질정이 녹는 게 느껴진다.




집에서 질정을 넣을 땐 그래도 괜찮은데 인공수정이 끝난 후 고생한 날 위해서 남편과 국내여행을 떠났다.

여행 갈 때도 지퍼백에 질정과 어플리케이터를 챙겨갔다.


호텔에서 샤워를 한 후 질정을 넣고 있는데 남편이 "아플 거 같아."라고 해서 너무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화장실 옆에 옷장이 있고 그 맞은편에 전신거울이 있어서 침대에 누워있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꺄악"


얼른 화장실 문을 닫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다.




착상이 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될 과정이지만, 수정과 착상이 되었을 거라고 믿고 질정을 넣고 있었다.

하지만 2주가 채 되기도 전부터 생리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미 수많이 경험했던 임신이 안 되었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나는 인터넷에서 '생리하는 줄 알았는데 임신'이라는 내용을 검색하면서 생리할 것 같은 느낌이 임신극초기 증상이기를 바랐었다.


결국 질정을 채 다 넣기도 전에 생리가 시작했다.


인공수정 시술 2주 후 임신테스트기는 한 줄이었으며 생리가 터졌다. 허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담담했다.


그래 내 이름은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슬램덩크


난임시술을 겪으면서 약해지는 멘탈은 슬램덩크 캐릭터들로 무장한다.


그래 내 이름은 ㅇㅇㅇ. 포기를 모르는 여자지.

다시 또 하면 돼.

또 하고 또 해서 아기를 가지면 돼.

포기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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