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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에필라 May 08. 2023

배아가 떨어져 나갔다

동결이식 1차 결과

-따르릉따르릉


오후 3시 30분쯤 전화가 울렸다.

병원에서 오전에 한 임신 피검사 결과를 알려주는 전화였다.


"피검 결과는 13이 나왔고요.

유트로게스탄 질정 타가셨죠?"


"네."


"원장님이 일단 일주일 질정 넣고 일주일 후에 다시 피검사하자고 하네요."


"네......"


'피검 결과가 13이라니......'

임테기의 연한 두 줄을 봤을 때부터 느낌이 좋진 않았지만, 낮아도 너무 낮았다.


난임 카페에 글을 올렸다.


"5일 배양 이식일로부터 10일 차 1차 피검을 했어요.

결과는 13이래요.

질정 유지하고 다음 주에 2차 피검을 하러 가요.

임테기도 흐렸지만 피검 너무 낮은 수치가 나와서 걱정이 되네요.

비슷한 경우 어떻게 되셨는지 경험 공유해 주세요.ㅜㅜ"


피검 수치가 낮았을 때 대부분 화유 또는 유산했다는 경험담들이 댓글로 달렸다.

시험관은 배아를 이식하기 때문에 정해진 일자에 정해진 수치대로 진행이 되어야지 예후가 좋다는 말이 많다.


"하......"


힘이 빠져서 침대에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늦은 저녁이었다.


남편은 오늘 회사일이 바빠서 오후에 보낸 카톡도 읽지 않은 상태였다.

좀 있다가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피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13 이래. 다음 주에 또 검사하기로 했어. 보통 100 정도는 돼야지 안정권인데 난 너무 낮아서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


"너무 염려하지 마."


남편의 말에 마음에 안심이 되었다.


농구 상식은 내게 통하지 않아. 나는 초짜니까
-슬램덩크 강백호


그래. 난 시험관 초짜다.

상식 따윈 모르겠고, 아무리 피검사 결과가 낮아도 잘 착상되고 임신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할 거다.


인터넷은 그만 보자.

때로는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도 많다.


여행계획 다 취소하고 이식 후부터 집 근처를 안 벗어나려고 했는데 오히려 이럴 땐 이식한 사실을 잊고 다른 일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행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새로운 것도 보고 싶다.


내일 아침부터는 임신테스트기도 하지 않을 거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질정을 넣고 기대도 안 하고 실망도 안 해야겠다.




이식 11일 차.

오전엔 여전히 생리통 같은 통증이 있었다.

저녁에는 누워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면서 토할 것만 같았다.

남편과 스테이크를 먹으려고 소고기와 새우를 테이블에 세팅해 놨었는데 음식냄새가 30배는 더 강하게 느껴져서 모든 감각이 극대화된 뱀파이어가 된 것만 같았다.


남편이 도착했는데 저녁밥을 못 먹겠다고 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머리와 뱃속이 파도치듯 울렁거리고 살짝 닫힌 문 사이로 고기 냄새가 너무 심하게 들어와서 남편한테 문 좀 닫아달라고 했다.


속이 안 좋고 머리가 아픈 것을 떠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음식 냄새를 예민하게 느낀 적이 있었나?

아니었다.


이게 바로 입덧이구나.

꺼지기 전 가장 밝은 빛을 내는 불빛처럼 그렇게 마지막으로 배아는 '나 여기 있어요'를 온몸을 통해서 보여줬다. 몸 상태가 안 좋아도 감사했다. 태어나서 처음 한 입덧.

아마도 입덧인 것 같다.

건강한 배아였으면, 제대로 착상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게 희미했던 임테기의 두 줄은 다음 날 아침엔 한 줄로 변했다.

미안하고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덤덤할 수가 없었다.


화유(화학적 유산)는 유산으로 치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임테기의 두 줄과 입덧의 경험은 분명히 배아가 내 몸에 붙어서 존재했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제 아무것도 없나 보다.

간당간당하게 붙어있던 배아는 떨어져 나갔고,

이젠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는 것 같다.

내 자궁벽이 낭떠러지였나.


낭떠러지 끝에서 떨어지기 싫어서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에 두 손을 잡고 발버둥을 치는 나의 배아가 상상이 되었다. 내가 더 푹신하고, 아늑하고, 쉬기 편한 자궁이 이었어서 네가 잘 붙어서 쉬었으면 좋았으련만......


이유를 나한테서, 또는 그 배아한테서 찾아서는 안된다는 걸 안다.

이대로 흘러 보내야 하고 나는 또 다른 배아를 이식하고 또 다른 임신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배아 하나하나가 아이처럼 느껴졌다.

아이를 안 가져본 나에게는 내가 채취해서 연구원이 배양해서 만든 그 배아가 아이와도 같아서 이대로 임신실패라는 게 사실 조금은 슬펐다.



안녕. 배아.

이제는 정말 보내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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