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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웩 미셔너리 로드

멈추고 생각하고 결론은 내리지 않으며 걷기

by 미 지

컴퓨터를 뒤적이다 둘째 날의 일기를 찾았다.


케냐 케리코 산골 마을 대가족 일가의 집.

윌리 켄 글래디스 준 샤샤 나리샤 따샤..

우선 다섯 명 이름만 외우려고 하는 중인데 안면인식 장애 수준인 나에게는 아이들 얼굴이 다 비슷해 보여서 어렵기만 하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해서 모두가 인사를 하고 난 뒤에 내가 다짜고짜 사진을 찍자고 카메라를 내밀면 하나같이 환하게 웃으며 좋아한다.


뿌연 색깔의 수돗물을 끓여서 마시면서 적응을 시작해 본다.

윌리는 내가 불편한 내색을 하지는 않을까 파악하느라 조심스럽게 관찰 중인 것으로 보이고.

나도 모르지. 내가 어떻게 될지.

아프리카 케냐의 수돗물은 처음이잖아. 칫솔을 하고 나서도 괜찮을지 걱정되다가...

일단 다 믿어보기로 한다. 나와 내 몸의 적응력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웃어주는 모든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만 가져보기.


나이로비 공항에서 이곳 케리코 마을까지 승용차로 4시간이 넘는 길이었다.

윌리 누이의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는데 인디언 쌀로 지은 밥에 그린빈 조림, 채소 볶음이 정성스럽게 플레이팅 된 예쁜 식사였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내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사라고 했지만 무엇이 필요해질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옥수수 프레이크와 망고주스 한 팩만 골랐다. 물과 빵과 스파게티면과 간식 몇 가지를 산 윌리와 따로 계산했다.


그 다음엔 ATM기에서 케냐 실링 인출하기에 도전했다. 환율을 모르는데 인터넷이 안되어서 ATM기를 두 번 조작해 육만 원 남짓의 케냐실링을 인출하는데 수수료만 만원이 들었다. 너무너무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모르던 한 가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수업료를 낸 걸로 마음을 다듬어보았다. 오천 실링이 아니라 오만 실링을 인출했어야 하는데 윌리도 켄도 내가 필요한 금액이 얼마인지 차마 묻지 못했던 거겠지, 뭐..


아스팔트 도로와 산과 나무뿐인 길을 지나다 옥수수밭이 보이는 도로를 지날 때 길 사이에 키가 크고 홀쭉한 소년들이 떼로 모여있었다. 차가 속도를 늦추며 창문을 열었고 그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열린 창문 안으로 자신들이 들고 있던 구운 옥수수를 한 개씩 차례차례 집어던졌다. 운전을 하던 윌리가 가격을 묻고 지불할 액수를 말하자 먼저 던져 넣은 아이들 것부터 해당되는 금액만큼만 남기고 차례차례 차에서 다시 거두어갔다. 두 개, 육십 실링. 첫 두 아이들은 돈을 나누어 가졌고 나머지 아이들은 자신들의 옥수수를 다시 거두어가며 그들의 규칙인 듯 차에서 멀어지면서 거래가 끝났다.

윌리가 옥수수를 잘라서 나에게 권했고 옥수수를 무척 좋아하는 나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거리에 원숭이들이 나와서 빈둥거리다가 속도를 늦추는 차에게 다가가면 차에 탄 사람들은 그 원숭이들 먹을만한 간식거리를 던져준다. 나도 한 번 해 보라길래 윌리가 달리는 차의 속도를 줄인 틈에 옥수수 조각 하나를 차창 밖으로 던져주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한 마리 원숭이가 걸어 올라오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줬어’ 하고 말해주었더니 다 알아듣는 듯이 그쪽을 바라보며 올라가기에 윌리도 나도 함께 웃었다.


과일과 그린빈을 봉지에 담아 파는 여자들이 서 있는 길을 지날 때 윌리는 또 차의 속도를 늦추었다. 차례차례 콩 봉지를 밀어 넣은 것들 중 4 봉지 40 실링을 지불했고 다섯 번째부터 밀어 넣은 여자들이 자기들의 콩 봉지를 하나씩 거두어가고 나서 차에서 멀어지는 또 한 번의 거래를 끝냈다.


온 가족이 환영 나와주는 윌리의 집에 도착했다.

화장실에서 찬물 샤워는 엄두도 못 내게 쌀쌀한 날씨.

집 안쪽에 별채처럼 지어진 부엌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낮은 부뚜막 화덕에 장작이 타고 솥에선 물이 끓고 있다. 아프리카 전통 부엌이라고 한다. 시차 때문에 눈은 감기는데 정신은 맑아졌다. 나 이런 거 우리 할머니 댁에 있어서 잘 알아. 우리나라도 이런 거 있었어.


윌리의 아내가 내가 몇 살이냐고 묻는다.


아주 많아... 비밀이야...

아들이 스물세 살이란 것만 말해줄게. 딸은 스물한 살...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 두 시부터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다섯 번 정도는 왔다 갔다 하면서 소란을 떨다가 다섯 시에 잠들어 여섯 시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예쁜 새소리. 너무 예쁜 새소리... '초콜릿초콜릿' 소리를 내며 운다.

아침을 맞아 소란스러워지는 집 안에서 우는 아이소리와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으로 나가 커피 마실 물을 끓여달래서 글래디스가 챙겨준 빵 한 개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치고 동네 산책을 잠깐 했다. 아침 공기는 서늘하고 선선하니 기분 좋은 날이었다.


난 준비해 온 치약을 가족 선물로 주었다.


윌리는 고장 난 샤워기와 전기 수리에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한다며 어딘가로 멀리 갔다.


오늘 하루 빈둥거리기가 목표인 나는... 인터넷 없어도 빈둥거려 보기... 그런데 인터넷이 없는데 뭘 하지? 잠시 멍하게 집 마당을 산책할 때 켄이 나를 불렀다.


보멧 카운티 선교사의 거리를 윌리의 할아버지와 함께 갔다. 선교사들이 10주 동안 걸었다고 전해진다 해서 지명이 텐웩이 되었다고 했다.


근처의 수력발전소에 체험학습을 나온 고등학생 한 그룹이 '무숭구'하며 나를 바라보다가 한 여학생이 씩씩하게 다가와 사진을 찍자고 한다. 내 어깨를 세게 잡아당기는데 역시 씩씩한 건강함이 전해져 온다. 나도 그의 허리를 당겨보지만, 더 힘주어 어깨를 당기는 센 손아귀 힘. 우리는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했다. 내가 졌다.


죠슈아는 그날 내가 준 치약보다 며칠 후 내 필통을 다 털어서 사무실에 쓰라고 준 4색 컬러 볼펜 네 자루를 더 많이 좋아했다.




윌리의 사무실이 보멧 중심가에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윌리는 '우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케냐는 스마트폰 사용이 편리하고 소액결제시스템도 잘 갖추어져 있다. 차가 있다면 누구나 우버를 할 수 있는 환경이다.


죠슈아가 활동지까지 픽업을 해 주기로 약속했던 어느 날 그가 동행할 수 없는 일이 생긴 듯했다. 죠슈아가 켄에게 차 키를 건네주어서 나와 켄 둘이서만 이동을 하게 되었을 때 켄은 아주 재빠르게 스마트폰으로 우버 승객을 구해서 목적지에 그녀를 내려주고 이용료를 받았다. 그날 죠슈아로부터 차에 기름을 넣으라고 천 실링을 받는 것을 보았는데 주유소에서 900실링을 지불하는 것도 보였다. 난 그냥 아무것도 눈치 못 채는 여행객 컨셉을 작동시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난은 원하는 것을 조금은 할 수 있는 넉넉함에게 곧잘 숨기고 싶은 모습을 들키곤 한다. 가난한 작은 마을에서 약간 넉넉하게 산다는 것은 간혹 힘에 부치는 책임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는 것은 아닐까? 작은 산골 마을 호스트 가정의 작은 넉넉함에 기대어 마을 공동체가 생활하기엔 부의 편차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였으므로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가끔 보였다.


죠슈아가 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콩을 얹은 우갈리를 나에게 사 주기 위해 나가려던 어느 날 오후 그는 (아마도 그를 집에 두고 가기 위해) 켄에게 쌀쌀맞게 일을 지시했고 (아마도 우리와 동행해야 그날의 식사가 가능했을) 켄은 지시받은 일을 서둘러 마쳐보려 애써보았지만 기어이 동행에서 배제되는 결론에 이르던, 두 사람 간의 사소한 갑을 관계를 눈치채지 못한 척했을 때에도 나는 똑같이 그런 여행객 컨셉을 작동시켰었다.


멈추고, 생각하고, 결론은 내리지 않는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초등학교에서 장애를 가진 초등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그와 비슷한 상황이 생기곤 했다. 그럴때마다 '교사'로써 어린 학생들의 일상에 아주 깊은 개입을 해야만 했었다.

바르게 생각하고, 정직하게 행동하고, 공평하게 나누고, 친절하게 대하고, 차별은 하지 말아야 하고....


과잉행동이 심한 1학년 장애학생에게도 꼭 '짝꿍'이 있어야 하므로 자리를 정할 때면 다소 힘들지만 장애친구를 도와줄 천사같은 도우미 친구를 꼭 정해달라고 학급 담임 선생님께 부탁을 하곤 했다. 말 없이 장애친구의 도우미를 자처했던 그 교실의 1학년 어린 '짝꿍' 친구에게 깊은 감동과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할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한 달이 채 못되어서 그 천사 '짝꿍'의 머리에 크고 깊은 원형 탈모가 생긴 것을 보던 날부터였을 것이다. 멈추고,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 일들에 대한 것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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