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슈아 집에 딸려있는 티 농장. 바나나 나무와 하늘과 무성한 초록빛.
죠슈아가 운영하는 학교는 방학기간이어서 9월이 되어야 학교 봉사를 갈 수 있다고 했다. 키모리 인근에 있는 고아원에 활동 계획서를 보여주며 봉사활동이 가능한지를 묻기 위해 켄과 함께 방문을 했다. 이런 방문이 흔한 일상인 듯 방문객인 나를 위한 환영의 인사로 아이들은 모두 모여서 부족의 노래와 춤을 공연했다. 어린아이들부터 성인이 다 되어 보이는 아이들까지. 아마도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의례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인 듯싶은 제법 훌륭한 군무. 과하지 않은 동작과 과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아프리카의 리듬이 멋있고 애틋하고 그랬다. 혼자 앉아 보기만 하기 미안해서 함께 서서 스텝을 따라 해 보기도 했다.
바깥에서 달리기 놀이를 몇 번 하고, 파이팅 빅토리 응원가 구호를 가르쳐주고 함께 외쳐보면서 한나절을 놀았다. 방학이라 어린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이 고아원에서는 더 이상의 활동이 허락되지는 않았다.
Kipsigis족은 아프리카 칼렌진 부족의 아족이다. 케냐에는 대략 45개의 부족이 있는데 칼렌진부족은 키쿠유족, 루히아족에 이어서 세 번째로 큰 부족에 들어간다. (소수민족 중에는 '마사이 워킹'으로 알려진 '마사이족'도 있다.) 킵시기즈족은 그레이트리프트밸리 인근의 고산지대에 많이 모여 살며 대부분 상업에 종사한다고 하는데 고산지대에서 길들여진 '폐'와 가늘고 긴 다리가 마라톤에 상당히 유리한 체형이어서 세계대회에서 줄곧 금메달을 놓치지 않는 선수를 배출하고 있다.
필시 선입견일 테지만 시장에 나가서 팔찌를 사면서 잠깐 접해 본 마사이족 사람들은 어쩐지 어깨뽕이 가득 들어가 있어 보였다. 아프리카 마사이족의 부심이리라 짐작이 가는 곧은 허리, 또렷한 시선 처리, 또박또박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킵시기즈족의 이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상 또한 선입견일 테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슬픈 눈과 별로 기댈 것 없는 것은 알아도 서로에 대해 기본적인 의무를 해 줄 기본적인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묻어있는 도전적이지 않은 시선 처리가 기억에 남아있다. 그 눈빛은 어떤 경우에든 상대방에 대해 선량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해주는 상냥함을 잃지 않을 듯 보였다.
보멧 시장에 있는 칼렌진 부족의 박물관을 둘러보고 수제 공예품을 하나 샀다. 천 실링, 만원.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내가 들고 있는 공예품을 본 죠슈아가 400실링 정도에 샀느냐고 묻기에 천 실링이라고 대답하니 아주 황당해했다. 나도 물론 그 가격이 현지에서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의 전통, 작고 보잘것없는 장소일지언정 하나 둘 모아 놓은 그 노력에 대한 내 나름의 존경심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설명은 하지 못했다. 한국에 가지고 오면 바로 버려질 기념품 일지는 몰라도 칼렌진 부족의 문화를 처음 접한 내 마음이 그러했다.
시장에는 과일이 참 흔했고, 알록달록 옷들은 아마도 여러 나라에서 보내어진 다양한 디자인과 색깔에 '새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통일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법 긴 시장 거리를 걷는 동안 황인인 나를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며 여러 명이 '무숭구! 무숭구' 소리를 냈다. 무숭구는 백인이라는 뜻이고, 이들에게는 백인이나 황인이나 모두 다 백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켄과 윌리가 설명해 주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간혹 들리는 몇 마디 단어와 분위기로 전해받는 것들이 있다.
처음에는 홈스테이 가정의 여러 사람들이 잘 구분이 가지 않았는데 차차 알게 된 것으로 이 집의 직계 가족은 집주인 죠슈아 내외, 죠슈아의 부모님, 죠슈아의 셋째 딸 글래디스와 그녀의 어린 아기 따샤, 죠슈아의 둘째 아들인 윌리였다.
켄은 이곳 킵시기즈 부족에서 운영하고 있는 볼런투어 개념의 공동체 운영진 실무 격으로 한국의 파견 사무소와 연락을 유지하고 방문객을 지원하는 실무를 맡고 있는 직원 개념이었다. 제법 눈썰미가 있고 영리한 편이어서 공동체 운영에 유용한 인물이기는 한 듯 보였으나 방문객이 없을 때는 이곳이 아닌 곳에서 지내다 일이 생기면 함께 지내는 듯했다.
일곱 명 이상의 아이들, 또 일곱 명 이상의 어른들이 수시로 드나들곤 했는데 농장 관리인과 일꾼이 포함되어 있었다. 글래디스의 어린 딸 따샤를 돌보는 젊은 여성 한 명과 따샤의 놀이친구 격인 초등학생 나리샤와 샤샤가 내가 가지고 있는 껌 봉지를 보고 무엇이냐고 물으며 먹고 싶어 하기에 남아있던 캔디 몇 개와 함께 있던 모든 간식들을 식구들에게 나누어 먹으라고 주었다.
잠시 소란스러움이 지나간 자리에 빈 봉지만 남았다.
나는 게르마늄 팔찌를 하나 차고 있었는데, 젊은 여성 한 명이 내게 그것을 달라고 했다. '친구가 준 선물이라 줄 수 없다,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그날 시장 둘러보기를 하던 중에 마사이족 사람들이 만들어 팔고 있는 비즈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켄에게 '집안의 여자 식구들에게 비즈 팔찌를 선물하고 싶다, 몇 개를 사면 되느냐?' 물었더니 네 개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고 나는 켄과 미리카(죠슈아의 큰 딸로 첫날 내게 점심식사를 해 주었던), 내 것으로 두 개를 더해 모두 여덟 개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4명의 여자 식구들에게 팔찌를 전달해 달라고 켄에게 부탁했다.
다음날 아침 그 젊은 여성이 또다시 나에게 팔찌를 달라고 했다. 어제 자기는 받지 못했다고 했다. 아마도 일하는 사람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나 보다. 어쩌면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준비해 두었던 내 몫의 팔찌 하나를 빼서 주었다. 그런데 이번엔 샤샤가 와서 남은 팔찌를 달라고 했다. 이제 없다. 다 주고 친구 거랑 내 것 하나밖에 없다고 설명했지만, 세 번을 더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꿋꿋하게 내 팔을 가리키며 팔찌를 달라고 하고, 나는 똑같은 말로 안된다고 하고.... 내 것을 줄 수도 있었고, 주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앞으로 여기서 한 달을 더 넘게 지내야 하니까 초기의 줄다리기에서 조금 깐깐한 시작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기 시작했다. 샤샤 다음엔 나리샤, 나리샤 다음엔.... 아마도 내가 예측 못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라는 게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으므로.
내 방 콘센트가 고장 난 상태라서 충전기와 멀티 아답타를 들고 거실로 수시로 오가며 충전을 하며 사용했는데, (오던 날부터 내일이면 고쳐주겠다고 했지만 매번 물어볼 때마다 '내일'로 미루는... 이건 아프리카식 시간 계산법이려니... 다 고쳐지는 날이 그 ‘내일’이려니... 하면서) 하루에 서너 번 충전을 하러 왔다 갔다 하는데 내 충전기가 신기해 보였는지 그 여성이 또 자기 핸드폰을 가지고 와서 내게 충전을 해 달라고 했다. 이건... 이젠... 뭔가 대책이 필요해 보여서... 켄과 윌리가 마침 거실에 있기에 내 충전 잭을 들고 거실로 가서 아가씨를 불러서 보여주었다. '내 충전기, 네 핸드폰에서는 작동이 안돼. 아임 쏘리...' 이건 다분히 의도적으로 켄과 윌리에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그 시간 이후로 아가씨는 더 이상 내 물건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일주일 정도 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는 일이 생긴 것은.... 내 탓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자신은 없다.
그리고 매번 '내일' 고쳐주겠다고 하던 그 콘센트는 일주일이 그냥 지나간 다음 켄을 콕 찍어서 고쳐달라고 했더니 그제야 시장에 가서 내 돈으로 콘센트를 사게 하고는 고쳐주었다.
소소한 삶의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선 내가 가진 물건들이 오히려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데 장애가 되기도 할 것 같았다. 내 것 다 너희들에게 털어 주었어. 내 방에 신기한 것 이젠 없어... 그런 선언이 필요한 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내 물건들에 대한 경계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윌리는 첫날 나의 몫으로 빵 몇 봉지와 물을 가져다 놓았다. 빵은 하루 만에 다 바닥이 나고 다음날 아침 내 몫의 빵은.... 윌리가 안 가져와서 없다고 부랴부랴 자신들의 음식을 만들어서 주었다.
서너 봉지의 빵과 커다란 생수통에 든 물이 하루가 지나기 전에 없어지고 있었다.
내 몫의 식사와 물을 따로 챙기는 일이 윌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내 식사를 나 스스로 준비하면서 다른 식구들이 함께 먹을 수 있게 하는 일은 내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민 끝에 비누, 칫솔, 휴지, 컵과 보온병, 성냥, 간식을 만들기 위해 사 온 과일, 감자, 밀가루, 식용유, 생수, 커피 같은 것들을 내 방 한쪽에 두고 쓰기 시작했다.
봉사활동 프로젝트를 위해 가져온 내 가방 속 풍선, 색종이, 색연필들은 집에서는 꺼내지 않아야 했다. 그것이 내 방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이 집의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또 내 방의 물건들 때문에 마음이 쏠리게 될 테니. 그것을 줄 수도 안 줄 수도 없는 나는 또 고민하게 될 테니.
내 나라에서는 한없이 사소한 물건들이 이곳 사람들과의 사이에 벽이 될 수도 있겠다는 소소한 각성과 함께 제법 긴 시간 마음 상하지 않게 지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형태의 벽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친구를 잃는 직업이야, 선생이란...."
십여 년 전 평교사로 정년퇴직을 하시던 선생님께서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며 해 주시던 말씀이었다.
우리는 조용히 수긍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을 바르게 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산다는 건 때론 여러 가치관과 가치관들이 서로 어긋나고 충돌하는 장면과 맞부딪혔을 때 마치 '솔로몬'과도 같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비교적 정확한 분석과 가장 보편적인 가치관의 척도로 일상을 보내다 보면 주변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저절로 같은 분석과 측정을 거치는 응대를 하게 된다. 그러한 일상이 쌓이다 보면 친한 친구들과의 거리에도 자연스러운 벽이 생기게 되고야 마는 일상을 매일 겪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은.
몸에 밴 측정과 처방과 응대의 사회적 기술을 사용해서 혼자서 천천히 벽을 세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또한번 '천천히 들여다 보고 가능하면 개입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어쩔 수 없이 누가 보아도 낯선 이중의 벽을 그렇게 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