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매장보다 현대적인 100년 전 건물

오토 바그너, 오스트리아 우체국 저축은행에서

by 최은희

오토 바그너를 찾아 나선 건 여행자로서가 아니라,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였다.

교과서에서 몇 번이고 마주쳤던 이름. 하지만 실물을 보면 다를까? 100년 전 건축이 지금도 통할까?


화려한 곡선 장식과 기능적 절제가 공존한다는 그 유명한 건축가의 흔적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보여줄 사진도 찍고, 공간의 결을 손끝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첫 번째 장소는 마욜리카 하우스였다.

나슈마르크트 시장에서 몇 발짝 거리. 건물 외관을 뒤덮은 화려한 도자기 타일. 파스텔 핑크의 꽃무늬가 빼곡하게 들어찬 외관은 분명 아름다웠다. 햇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유약의 광택, 테라스 공간 벽면에 섬세하게 그려진 초록빛 식물 문양. 사람들은 무심히 그 앞을 지나가고,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저 장식들 예쁘긴 하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감동이라기보단 확인에 가까웠다. 사진으로 봤던 그대로였다. 책 속 이미지가 실물로 바뀐 것뿐. 아름답지만 감응이 적었고, 그 시대엔 특별했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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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바그너의 마욜리카 하우스 (왼쪽), 메달리온 하우스 (오른 쪽) / 나슈마르크트 시장 근처


바로 옆 건물, 메달리온 하우스도 비슷했다. 황금빛 타원형 장식이 외벽을 수놓고 있었다. 화려했다. 우아했다. 그러나 여전히 '과거의 유산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벗어나지 못했다.


'역시 그렇지...'


내 안의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아르누보는 화려하지만 결국 과잉된 장식이잖아.'


크게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기대했던 마음만큼만 받은 느낌이었다.

언젠가 사라질지 모를 건물을 두 눈으로 봐서 좋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진 않았다. 아마 내일이면 흐릿하게 잊힐 것 같았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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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바그너의 우체국 저축은행, 아르누보의 꽃과 식물 장식이 모더니즘의 기하학적 장식으로 바뀌었다.


우체국 저축은행, Österreichische Postsparkasse


오토 바그너가 1906년에 설계한 건물.

리스트에 적어두긴 했지만, 마욜리카 하우스와 메달리온 하우스를 보고 온 직후라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또 비슷하겠지. 건물 외관과 내부 사진 몇 장 찍고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려 했다.


건물 앞에 섰다.

외관부터 달랐다. 마욜리카 하우스처럼 화려한 장식은 없었다. 메달리온 하우스처럼 금빛 문양도 없었다. 대신, 대리석과 금속 패널이 절제된 기하학으로 외벽을 구성하고 있었다.


'뭔가... 다른데?

아르누보와 모더니즘의 중간 단계인가?'


건물 지붕의 두 수호천사 조각상을 올려다보고, 입구로 들어섰다. 목재 회전문, 적자색 카펫이 깔린 대리석 계단, 긴 복도. 알 수 없는 기대감을 안고 마지막 문을 밀었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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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바그너의 우체국 저축은행, 빛이 쏟아지는 공간


넓고 개방된 공간에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천장 전체를 뒤덮은 반투명 유리를 통해 자연광이 공간 안으로 흘러들었다. 부드럽게, 그러나 압도적으로. 빛은 공간의 모든 표면을 쓸고 지나가며 반짝임을 남겼다.


은빛 알루미늄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기둥 표면에는 수천 개의 리벳(금속 못)이 기하학적 패턴을 이루며 박혀 있었는데, 그 자체로 장식 효과를 냈고 그 하나하나가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금속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니. 차갑고 단단한 재료가 빛과 만나 부드러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


바닥은 회색과 아이보리색이 규칙적인 사각형 패턴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로 유리블록이 박혀 있었다. 빛은 유리블록을 통과해 아래층까지 내려갔다. 가장자리에 얇은 금속 프레임을 끼운 유리블록 위로 빛이 내려앉으면서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보석처럼 느껴졌다.


'이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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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저축은행, 카페에서 음미하는 공간


앞서 본 두 건물과는 모든 게 달랐다.

마욜리카 하우스와 메달리온 하우스는 아르누보의 '과거'를 보여주었다면, 이곳은 모더니즘의 '시작'을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장식을 걷어내고, 재료와 구조 자체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공간.


벽면 곳곳에 설치된 난방용 알루미늄 통풍구조차 총체적인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기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되, 그 자체를 디자인으로 승화시킨 것. 모든 디자인 요소는 장식보다는 기능을 우선으로 따랐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모더니즘의 그 유명한 선언이 여기 있었다.


'100년 전 사람이 이미 이걸 생각했다니.'


새삼스럽게 오토 바그너가 달리 보였다.

당시로선 실험적이었을 재료의 조합. 대리석, 알루미늄, 유리와 강철, 그리고 유리블록. 전체적으로 밝고 단순한 색상을 사용해 깔끔하고 현대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불필요한 장식은 최대한 배제하고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 공간의 비례, 재료의 조합, 빛의 연출까지 모든 요소가 통일된 콘셉트로 설계되어, 공간 전체가 하나의 완성된 예술작품이 되었다.


100년 전 디자인이지만, 최근 만들어진 하이테크 공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요즘 애플 스토어보다 더 현대적일지도 모른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 빛의 활용, 재료의 정직함. 스티브 잡스가 추구했던 그 미학이 이미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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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응용 예술대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공간


하지만 이곳은 더 이상 '오스트리아 우체국 저축 은행'의 본사로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

현재는 이 건물을 과학 아카데미 연구소, 카페, 비엔나 응용 예술대학 등에서 공간을 나눠 쓰고 있다.


중앙 공간은 카페로, 가장자리 공간은 워크숍이나 세미나 장소로 쓰인다. 노트북을 펼친 사람,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과거 은행이었다는 흔적은 카페 카운터 상부의 숫자들뿐이다.


맨 안쪽 문을 열고 더 나아가면 과학 아카데미 연구소와 응용예술대학이 사용하는 공간이 나온다. 나의 호기심은 당연히 응용예술대학 쪽. 여름 방학이라 누가 있을까 싶었는데, 문이 열려 있어서 잠깐 들여다봤다. 학기말 과제물인지 공간디자인 프로젝트가 걸려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우리와 비슷했다. 이 공간에도 바그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하학적 패턴, 금속과 유리의 조합.


'100년 전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공간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다니.'


부러웠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창의적인 영감이 절로 생길 것만 같았다.


마욜리카 하우스나 메달리온 하우스는 아름답지만 세월의 때를 묻힌 채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우체국 저축은행은 달랐다. 여전히 숨 쉬고, 사람을 품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100년 전에 지어진 공간이 여전히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 신기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공간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좋은 디자인은 시간을 이긴다.


KakaoTalk_Image_2025-07-26-21-29-24_023.jpeg 오토 바그너의 오스트리아 우체국 저축은행, Timeless design


카페 중앙의 둥근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 오래 머물며 바그너의 공간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 리벳이 박힌 금속 기둥, 기하학적 패턴의 바닥. 그 모든 게 멋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비엔나에서 오토 바그너를 찾아다닌 하루.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다시 감동받은 하루.


마지막으로 들른 우체국 저축은행에서 나는 여행자이기 이전에 디자이너로서 깨달음을 얻었다.


시간이 지나도 빛나는 아이디어였고,

장식을 걷어내고 본질에 집중한 용기였고,

새로운 재료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실험정신이었다.

그건 비단 디자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공간.

아름다운 공간은 사람들이 계속 머물고 싶게 만드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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