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처음엔 남자친구와 동거하는 사실을 주변에 밝히지 않으려고 했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피곤한 상황이 펼쳐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사생활에 관해 조금이라도 오픈하면 야금야금 내 영역에 침입해 들어와 어느새 내 빤스 색깔까지 관여하려는 K-오지랍, K-조언에 대해 다들 질리도록 잘 알고 있을테니 긴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래도 집을 옮긴다는 사실을 직장에 고지해야 했기에 그에 따른 예상 질문을 떠올려 봤다. 혼자 산다고 할까? 아니면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서 함께 살게 됐다고 할까? 왜 하필 갈월동인지 이유도 설명해야하나? 아니면 친한 동기에겐 사실대로 말하고 팀원들만 모르게 할까? 그러다 중간에 말이 꼬이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앞뒤 안 맞는 말이라도 하면!? 점점 골치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이게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인지 모를 지경이 되자 문득 지독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아, 그렇지 참. 이 골치 아픈 각색은 내가 평생 해오던 짓이지.
나에겐 두 가지 버전의 가족이 존재한다. 사이좋은 부모와 말 잘듣는 자녀로 구성된 대외용 버전의 가족과 각각 따로 사는 부모와 독립심 강한 자녀로 구성된 진짜 버전 가족. 내가 진짜 버전 가족에 만족하냐 마냐와는 상관없이 듣는 사람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대외용 가족을 만들어놓고 산다. 사람들은 본인이 생각할 때 정상 카테고리에 들지 않는 개념을 접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하기 때문이다. 나에겐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가족들이지만 아직 뭇사람들이 소화하기엔 우리 가족이 그로테스크한 면이 있긴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의 동거 생활까지 대외용 버전을 만들자니, 나도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뻔히 일어난 일을 없었던 일인 척 하면 어디선가 탈이 난다. 지금까지는 내 속에 탈이 나는 것으로 감당하려 했는데 더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탈이 나려면 듣는 사람 쪽이 불편을 감수하라지 뭐. 나는 동거 생활과 동거 대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친구들에게도 직장에서도 이웃들에게도 동거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까지 할 생각 있어?
열이면 열, 동거를 한다고 했을 때 나이와 성별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물론 저 질문이 나오게 된 경위를 십분 이해한다. 동거에 대한 마음가짐이 얼마나 진지한지, 동거하는 상대방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면 왜 결혼을 하지는 않는 것인지, 만약 다른 상대와 결혼하게 된다면 동거를 했단 사실이 흠이 될까 걱정되진 않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다발을 최대한 매너 있게 벼리고 벼리다 보면 저 질문 하나가 뾰족하게 솟을 수밖에. 난 상대방에 따라 대답을 달리했는데, 염려 많은 기성세대에겐 “네, 괜찮으면 결혼도 해야지요.”라고 대답했고 막역한 사이의 지인들에겐 “아니, 굳이 결혼까지 생각하고 사는 건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물론 진심은 후자였다.
그럼, 부모님은 뭐라고 하셔?
그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질문은 동거에 대한 부모님의 반응이었다. 아무리 머리 굵은 성인 두 명이 결정한 일이어도 부모님의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부모님께 이래라저래라 간섭 받지 않는 나조차도 처음 동거에 대해 말을 꺼낼 때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두 분 다 간단하게 “너라면 잘살겠지.”라며 긍정적으로 답해주시긴 했지만 말이다. 아마 우리 부모님은 나보다는 이제 나 없이 혼자 살게 될 언니 걱정이 앞서셨을 것이다.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아빠가 언니에게 ‘그래도 각자 자는 방은 따로 쓰겠지?’라고 넌지시 물어보셨다고 한다. 아이고 아부지!) 난 사실 우리 부모님보다 설쌤네 부모님의 반응이 더 걱정이었다. 혹시라도 이참에 결혼까지 하라고 설쌤을 채근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다행히도 설쌤네 부모님은 같이 살 집이 살기 괜찮은지에 대한 걱정만 하시고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으셨다고 한다. 동거 당사자인 나로서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어쩌면 유니콘 같은 부모님을 갖고있는 걸지도 몰라. 심지어 쌍방이 모두 그러하니 어마어마하게 낮은 확률의 복을 타고난 건가? (아니면 그냥 끼리끼리의 사이언스가 통한걸까) 물론 부모님들의 더 깊은 속마음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쩝.
그럼 대체 결혼이란 건 언제, 어떻게 하게 되는 걸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한때는 결혼해서 잘살고 있는 사람들만 보면 물어보곤 했다. “결혼을 결심한 계기가 뭐예요?” 대답은 ‘아이가 갖고 싶어서, 상대방 혹은 부모님이 원해서,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서’와 같은 구체적인 것과 ‘자연스럽게, 당연히 해야 할 것 같아서, 너무 오래 사겨서, 타이밍이 됐다고 느껴서’와 같이 두루뭉술한 것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나의 케이스에 적용할 만큼 유용한 답변은 없었다. 하늘에서 전지전능한 누군가 내려와서 나의 남자친구가 결혼 상대인지 아닌지 알려주면 좋으련만! 아니면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마법처럼 펼쳐지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설쌤과 지지고 볶으며 사귀는 4년 내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극적인 일이라면 여차여차 인연이 닿아 이렇게 갈월동 적산가옥에 함께 살 게 된 정도랄까.
있잖아, 실은 나도 동거중이야
정말 많은 분들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혹은 반가움의 미소를 띠며 본인도 동거중이라고, 혹은 과거에 동거 하다 결혼에 골인했다고 밝혀주셨다. 동거를 하기 전까진 몰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거 경험자란 사실을. 그리고 열에 아홉이 동거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경험해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같이 안 살아보고 결혼하는 게 더 무모한 행동처럼 느껴질 정도야." 끄덕끄덕 얼마나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집을 구하기도 어렵고 세를 나눠 내면서 부대껴 살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찾기도 어려운 도시 생활에서 연인끼리의 동거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분들중에 동거 사실을 공개하고 다닌 사람은 극소수였다. 동거의 가장 큰 단점을 꼽자면 역시 타인의 시선 아닐까?
혹시 저도 동거해도 괜찮을까요?
주로 어린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사귀고 있는 상대가 있고 집을 구해야하는데 동거를 해볼까하는 생각도 든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타인의 동거 시작 여부에 대해서는 쉽게 의견을 내기가 어려웠다. 특히 동거메이트 중 한명이라도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독립한 상황이 아니라면 더더욱. 내가 5년이고 10년이고 성공적인 동거 생활을 해냈다고 해서 해줄 수 있는 조언도 아닐듯 싶었다. 각자에겐 각자의 관계와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결혼은 언제 결심하게 되나요?"하고 물어보는 나를 보는 기혼 선배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도 한가지 확실히 얘기해줄 수 있는 건, 경제적으로 이슈가 없고 결혼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같이 한번 살아본다고 해서 크게 손해볼 건 없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결혼 생활이 어그러지는 것보다 동거 하다 갈라서는 게 피해 규모나 심적인 부담 면에서 훨씬 낫다고 본다.
설쌤과 함께 산 지 벌써 꽉 채워 2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 이 생활이 매우 만족스럽지만 행복한 동거의 비결을 묻는다면 나는 운이 좋았다는 것밖에 아무 할말이 없다. 늘상 붙어있어서 서로에게 질려버리는 건 아닐까, 싸우고 삐걱대다 파국에 이르진 않을까 걱정했던 때도 있었더랬지. 그런데 낮밤이 다른 우린 생각보다 서로의 생활 패턴에 잘 스며들었고, 둘 다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집을 꾸미거나 시간을 보내는 데는 취향이 일치했다. 함께 살아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많은 부분이 막상 뚜껑을 까보니 천만다행히 ‘문제없음’으로 판명났달까. 나와 설쌤 둘 다 노력도 많이 했지만, 돌이켜보면 다 운이었다. 함께 살면서 만족스러운 부분들이 살기 전에 본 모습으로 유추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말이다. 이렇게 잘살고 있으니, 처음엔 전제되어 있지 않았던 결혼에 대한 생각이 이젠 바뀌었냐고?
그렇진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설쌤과 함께 사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러울수록 더더욱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불명확해져 간다. 지금으로 충분히 괜찮은데 뭐하러 결혼까지? 어쩌면 동거하는 커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덕담은 “와, 결혼하셔도 되겠어요!”가 아니라 “와, 결혼까지 안 해도 되겠는데요!”가 아닐까. 동거가 결혼의 전 단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두 사람의 최종 목적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 이 생각이 더 많은 사람에게 좀 더 쉽고 가볍게 떠올랐으면 좋겠다. 내가 자라온 가정환경을 비롯해 지금 남자친구와 꾸려가고 있는 동거 생활까지, 어쩌면 계속 비주류에만 속해 온 나로서는 세상에 더 다양한 형태의 가족 단위가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게 바로 이렇게 소소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나의 동거 생활을 기록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 이야기의 어느 한 구간에 결혼 에피소드도 기록되게 될까? 그 답에 대해서는 일단 열어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