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사람들이 이상형이 뭐냐고 물으면 항상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대답해왔다. 자주 편지를 써주는 사람.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나를 보니 떠올랐다며 일필휘지로 시 한 편을 적어주는 사람. ‘그는 아마 애드리언 브로디처럼 슬픈 팔자 눈썹에 아멜리에의 남자 주인공 니노와 같은 귀여운 매부리코를 하고 있을 거야…’ (너무 눈살 찌푸리지 말아 주시라. 로망은 로망일 뿐이니) 한번은 회사에서 여사원들이 모여 각자의 이상형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방금 말한 그대로를 내 이상형으로 말했더니 한 여자 선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는 말. “혀에 기름 두른 사람이 좋으면 차라리 시집을 사서 읽으세요~” 듣자마자 와장창 감상이 깨져버렸다. 그분의 사연인즉슨, 말 잘하는 남자와 사귄 적 있는데 그놈이 잘못은 지가 해놓고 변명을 청산유수로 줄줄 읊는 탓에 정작 반박도 못 하고 속만 썩였던 경험이 떠올라 본인도 모르게 한탄에 가까운 조언이 나온 것이라고 했다. 끄덕끄덕. 물론 선배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나는 여전히 애드리언 브로디가 건네주는 시 한 편을 받아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좋다는 건 아니다. 기자나 소설가 혹은 카피라이터와 사귀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에 대해, 감정에 대해 소상히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듣고 있지, 애드리언 브로디?) 그래서 나는 종종 설쌤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설쌤의 마음은 어디쯤 와있는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글을 보면 알 수 있으니까. 특히 연애 초반,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트기 전 편지 요청을 많이 했다. 나 또한 사랑인지 아닌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상대방은 그러면 안 된다는 약간의 심보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설쌤 이 사람, 분명 따뜻한 성격인데 감정 표현만큼은 낯 간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림에는 인류애가 가득한데 가끔 말하는 걸 보면 보통 사람보다도 건조한 로봇 같고… 대체 어느 쪽인 거지? 아직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모르던 연애 초, 그런데도 어느 정도의 답답함은 해결하고 볼 일이었다.
“설쌤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요?”
편지나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데이트하던 도중, 나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다짜고짜 설쌤에게 질문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지어나갈 궁전의 조감도 정도는 미리 살펴볼 권리는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라, 예상이 빗나갔다. 설쌤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진 것이다. 내가 상상한 건 조금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힐지언정 용기 내서 자신만의 사랑 철학에 대해 더듬더듬 말하는 설쌤이었는데. 내 앞에 앉아있는 로봇은 디기딕 디기딕 머리를 굴리며 자신의 생각에 한 톨의 거짓도 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애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용어로 표현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의 침묵 동안 무시무시한 불안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다림 끝에 설쌤이 대답했다. “사실 사랑이라는 게 진짜 있는 개념인지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고 더 커지고 더, 더, 더 커질 수는 있겠죠.”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설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냥 좋아하는 것보다 더 많이 좋아하게 되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좋아함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었다.
툭, 투두둑 툭툭.
무슨 지브리 애니메이션 작화 같은 왕방울만 한 눈물이 눈에서 낙하했다. 설쌤의 대답을 듣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당황한 설쌤은 휴지를 왕창 뽑아서 내 눈에 갖다 댔다. 믿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거랑 사랑하는 게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지? 사랑이란 건 절대적으로 다른 개념인데…’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돈하느라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내지르고 있는 포효를 최대한 볼륨을 낮추어 말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사랑을 해욧!?” 설쌤은 매우 미안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더 나빴다. 본인은 본인의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저 표정! ‘자버가 그렇다면 내가 한번 다르게 생각해볼게.’ 하는 기대하던 대답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예 더 목 놓아 울어버렸고 공포에 질린 설쌤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마 이 사람이랑 얼마 못 가서 헤어질 수도 있겠어.’ 당연하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과 사랑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설쌤이 정말 사랑이 없는 사람일지, 사랑이 있지만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지, 사랑을 알지만 표현하는 방법이 서투른 건지 알아보는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설쌤은 만나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헷갈렸다. 설쌤이 나를 보는 눈에는 사랑이 가득한데? 사랑을 모르는 사람의 손이 이렇게 따뜻할 수는 없는데? 그런데 왜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특히 설쌤이 찍어준 내 사진들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눈, 코, 입, 실루엣 분명히 다 내 것인데 내가 본 적 없는 내 모습이 찍혀 있었다. 필터도 보정도 없는데 예뻐 보였다. 설쌤을 바라보는 내 표정이 이뻤고 그런 나를 고스란히 담은 설쌤의 눈이 이뻤다. 영원히 낯설 것 같은 그 사진들 앞에서 내 마음은 자존심도 없이 누그러지곤 했다. 느낌이 왔다. 이 사람 안에는 사랑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굳이 설쌤 입으로 표현해주길 바라는 내 심보에 있었다.
나는 설쌤에게 어렵게 얻어낸 편지들을 고이 간직한다. 그리고 가끔 설쌤 앞에서 그 편지들을 꺼내서 소리내어 읽는다. 그러면 설쌤은 부끄러워하면서 귀를 막거나 도망갔다. 왜 그렇게 민망해하냐고 묻자, 본인이 썼지만, 본인이 쓴 것 같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꼭 마치 상황에 걸맞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옷을 걸친 사람처럼. 반면 내가 요구하지 않아도 설쌤은 데이트 때마다 매번 그림 선물을 해줬다. 설쌤 맞은편에 앉아있는 내 모습을 정성스럽게 그려서 아무렇지 않게 툭 건네줬다. 카메라 렌즈조차 거치지 않고 당신의 눈에 찍힌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출력한 그 그림은 내게 매번 똑같은 크기의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피사체인 나 스스로 하기 힘든 일을 그림은 기꺼이 수행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있는 그대로 아름답기’ 였다. 나는 설쌤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설쌤 눈에 비친 나를 사랑하는 걸까? 그 어떤 언어 표현보다 모순 없이 사랑을 보여주는 그림을 보며 주제넘게도 4세대 아이돌 노래 가사 같은 노골적인 사랑 고민에 빠져보기도 하는 나였다.
“혀에 기름 두른 사람이 좋으면 차라리 시집을 사서 읽으세요~”
문득 회사 선배의 조언이 떠오르는 날이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감상에 푹 빠져 생각을 정리할 겸 글을 쓰려던 참이었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않고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톺아보며 정돈된 생각을 기록하는 일, 그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활동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다. 설쌤이 그런 활동을 잘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활동을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야.’ 다만, 공유가 아닌 강요를 했다는 게 문제일 뿐. 사랑이 무어라 구구절절 설명은 못 해도 갈증을 잘 느끼는 나를 위해 늦은 밤 내 머리맡에 물 한 잔 떠다놓는 다정함을 베푸는 사람을 인제 그만 괴롭힐 때가 된 것 같았다. 시 쓰는 애드리언 브로디가 슬픈 팔자 눈썹을 하고 내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사랑을 정의하고 글을 쓰는 건 아무래도 네 몫이야. 굿바이!”
내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나레이션이 흘러나오고 있다. 실시간으로 상황을 서술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렇다. 그중에 기록해두고 싶은 걸 글로 적는다. 모든 사람의 머리에 각자의 나레이션이 있는 줄 알았는데, 최근에야 알았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그래서 하루는 설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본인은 나레이션은 없지만, 시선을 두는 모든 곳에 가상의 프레임이 함께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릴 때 가장 괜찮은 프레임을 고민하며 풍경의 가장자리들을 도려내곤 한다고 말했다. 내가 속으로 수많은 문장을 타이핑하고 있을 때, 옆에서 설쌤은 수많은 이미지를 찍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받아들여도 출력 형태가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 설쌤은 마음을 그대로 인화해서 보여줄 수는 있어도 자기 언어로 번역해 읊을 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고 있고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거를 시작하고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다 보니 서로 카톡을 주고받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급한 부탁이나 사무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닌 이상 바로 옆에 있는 설쌤에게 말을 걸면 되니까. 그리고 같이 산 지 몇 달이 지난 후 문득 깨달았다. 카톡이 줄자 서로 감정 상할 일이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아, 싸움의 원흉은 그놈의 말, 말, 말이었구나.’ 설쌤은 확실히 말보다 행동에 강한 사람이다. 가만 보면 생색 담긴 미사여구 없이 날 위한 배려를 실천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봉사하라’라는 입력값을 받아들인 로봇처럼 묵묵하게. 그러다 보니 동거를 시작한 후로 설쌤에게 사랑 표현을 갈구하거나 ‘말을 왜 그렇게 해?’ 따위의 딴지를 걸거나 하는 일이 일절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의 어리석은 조율 행위는 사라졌다.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에게 사랑을 들려달라고 요구하지 말자.
출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서 퍼뜩 고개를 숙여 마스크 안으로 눈물을 흘려보낸 날이 있다. 언젠가 설쌤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꼭 그의 손에 카메라를 쥐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설쌤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가정 하에...!) 훗날 죽어서 저세상으로 가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보게 될 장면이 나를 찍고 있는 설쌤이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설쌤 없이 살아있는 남은 날 또한 담담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또한 설쌤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해도 눈물 흘리는 날이 잦아졌다. 카메라를 들고 나를 향해 서있는 나이 든 설쌤을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마음이 뭉클해진다. 벅찬 행복의 눈물이 흐른다.
여전히 설쌤은 내 그림을 많이 그려준다. 그림 속의 내가 여전히 사랑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다행히 시간이 지났다고 설쌤의 마음이 변하거나 한 것 같진 않다. 이젠 내가 그림 속의 나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설쌤의 눈으로 해석된 버전의 내가 좋기 때문이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나에 대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석본이 존재하는 것과 다름없다. 남의 눈을 빌리지 않고선 본인의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의 불완전성 만큼 완벽한 설계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번 생의 해석본엔 아무래도 그림이 가득할 것 같다. 괜찮아, 큐레이팅은 내가 하면 되니까. 그게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니까. 지금도 이렇게 몇 천자의 글로 내 마음이 어떻고 내 사랑이 어쨌는지 구구절절 쓰고 있는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