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제일 좋아하는 가수? 하림. 그렇다고 그의 빡빡이 머리 스타일까지 좋아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가수 하림을 좋아했던 덕분에 설쌤의 모자 안에 머리카락이 없다는 사실을 스무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여성들은 잘 모르지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남성 중 다수가 자연스러운 상실과 맞서 싸울 것인지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결론만 두고 봤을 때 대부분의 빡빡머리는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상실을 스타일로 승화시킨 셈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우리 설쌤이다. 가끔 설쌤의 머리 스타일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위쪽은 타의로, 아래쪽은 자의로 빡빡이가 되었습니다.” 딱히 숨겨야 할 이유가 없는 팩트지만 혹시 이 글을 보는 여성분 혹은 축복받은 머리숱 소유자가 계신다면 빡빡이에게 왜 빡빡이가 되었냐는 질문은 굳이 꺼내지 않길 권장해 드립니다. “들을 수 있는 대답이 거의 뻔하거든요!" 우리 주변에 수많은 대머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머리는 놀림의 대상이 되거나 남을 깎아내리는 표현으로 악용되는 사례만 난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나름 한 명의 대머리를 사랑하고 오랜 시간 대머리와 함께 살아본 사람으로서 대머리에 대한 다른 각도의 시선 하나를 세상에 던져보고자 한다. 일명 대머리와 ‘살아’ 보고서.
#1. 촉감
대머리의 뒤통수는 정말이지 유혹적이다. 뽀얀 생크림이 풍성하게 올라간 케이크를 주먹으로 내리쳐 뭉그러뜨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보신 적 있으신지? 대머리의 뒤통수는 그와 비슷한 충동을 느끼게 한다. 손가락을 있는 힘껏 쫙 펼쳐서 판판한 살색 벌판에 철썩! 내리꽂으면 손바닥으로부터 온몸까지 짜릿한 쾌감이 퍼질 것 같은 기분, 솔직히 매번 상상한다. 하지만 대머리도 결국 두피다. 샤워하고 갓 나온 뽀송뽀송한 버전이 아닌 이상 머릿기름이 둘러진 두피를 함부로 만졌다가 후회할 수도 있다. 그렇다. 많은 후회 끝에 하는 말이다. 그런데 강아지나 고양이의 발바닥 꼬순내에 중독되듯 대머리 뒤통수에서 풍기는 특유의 사람 냄새(?)가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종종 설쌤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냄새를 맡으면 마음에 안정감이 온다. 폭신폭신한 털이 주는 편안함은 없지만, 빡빡이 꼬순내의 매력도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
#2. 유약함
머리카락도 기능이 있다는 걸 소거법에 의해 깨달았다. 두피가 그렇게 약하고 예민한 부위인지 몰랐다. 대머리는 뜨거운 볕에 쉽게 화상을 입고 찬 바람이 거셀 때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시달리기도 한다. 게다가 가끔 모서리에 머리를 찧기라도 하면 방어막이 없어 영락없이 피를 찍- 흘리는 일이 다반사다. 가녀린 스핑크스 고양이를 볼 때 안쓰럽고 가여운 마음이 드는 것처럼 설쌤의 맨머리도 보호본능을 잔뜩 자극하곤 한다. (어떨 때는 몸을 웅크리고 자는 모양새가 꼭 갓난아기 같아서 소름이 돋기도 한다) 그러니 여름에는 캡 모자, 겨울에는 따뜻한 비니가 필수일 수밖에. 스타일 내기도 얼마나 좋은가. 솔직히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게 쌓인 설쌤의 모자 컬렉션을 처음 봤을 땐 기겁하긴 했다. 이 사람 대체 모자에 얼마를 투자하는 거야? 그래도 내가 1년에 미용실에 쓰는 비용에 비할 바냐. 게다가 샴푸도 안 써, 드라이기도 안 써, 헤어크림도 안 써, 얼마나 경제적인지! 그러니 모자를 살 때만큼은 잔소리를 아끼려고 노력한다. 새 모자를 쓴 설쌤을 보면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새 머리 했네! 잘 어울린다.”
#3. 화장실
머리를 안 감는다고 해서 샤워 시간이 짧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의 샤워 리스트엔 이발 수행 시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쌤에 의하면 전기면도기보다 아날로그 면도날이 섬세하고 예리하게 잘 깎인다고 한다. 비싼 샴푸 대신 향 좋은 비누는 필수다. 이발 직후의 맨머리는 극강으로 뽀송뽀송하고 향기롭고 보드랍기까지 한데 대머리의 애인은 이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 된다. 이 세상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나에게만 허락된 그 영역을 잔뜩 누릴 시간이다. 킁킁 향도 맡고 문질문질 만져준다. 그러면 설쌤은 귀찮아하며 살짝 샐쭉해지는데 그 모습이 재밌어서 더욱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샤워하고 나와도 화장실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없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깨끗하니까 장점만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동거인으로서 집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에 대한 귀책 사유가 100% 나에게 있다는 게 단점이다. 청소도 설거지도 본인 몫 이상으로 나서서 하는 설쌤이지만 화장실 머리카락 뭉치만큼은 잘 손대지 않는다. 그래, 염치가 있으면 머리카락만큼은 내가 치워야 하는 게 맞지. 대머리에게 머리카락 청소시키는 악마가 되진 말자!
#4. 쓰담쓰담
나는 머리숱이 정말 많다. 어쩌면 나의 까만 풍성함이 연인으로서 셀링 포인트였을까? 설쌤의 무의식중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난 남이 머리에 손을 살짝만 대도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악’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정도로 누군가 내 머리를 만지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오직 이성적인 끌림이 있는 사람의 손길만 괜찮다. 친한 친구도 심지어 친언니의 손길도 싫다. 그래서 자주는 아니고 아주 가끔 설쌤에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때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설쌤의 쓰담쓰담이 어찌나 어눌하고 어색한지 화는 안 나고 웃음이 난다. 시골 강아지를 투박하게 쓰다듬는 아저씨 손길 같아서 정겨운 맛이 있다. 쓰담쓰담이 끝나고 나면 머리는 무조건 잔뜩 헝클어져 있다. 어릴 때 여동생을 갖고 싶었던 설썜은 학교 가기 전에 여동생 머리를 묶어주는 상상을 종종 했다고 한다. 그 얘길 듣고 냅다 내 머리를 들이밀었다. 한번 묶어보라고. 설쌤은 머리를 모을 줄도 모르고 끈으로 여밀 줄도 모르니 결과는 보나 마나 엉망진창. 나에게도 로망이 있다면 대머리가 땋아주는 양갈래 머리를 한번 해보는 것이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니 잘 훈련하면 언젠가 대머리 미용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나 너무 사악했나?
#5. 전문가 포스
웹툰 작가 주호민이 대머리는 뭘 해도 전문가 같아 보이는 게 장점이라고 말한 적 있다. 대머리 관찰자로서 무척 공감하는 바다. 한 톨 머리카락 허용하지 않는 깨끗한 두상은 산만한 일로부터 자신을 완벽히 차단해낸 결연한 의지의 표상인 것만 같다. 급 각성한 영화 속 주인공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위를 들고 서걱서걱 머리를 잘라내는 데에도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설쌤 또한 뭘 해도 ‘저 지금 완전히 집중하고 있어요. 건드리지 마세요.’ 하는 전문가의 아우라가 물씬 풍긴다. 그림은 본업이라 그렇다 치고, 땀을 살짝 흘리며 불 앞에서 프라이팬을 뒤집으며 열정적으로 요리할 땐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이랏샤이마세~” 인사를 건넬 것 같고 롤업 바지를 입은 채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벽에 못질을 할 때면 건설 현장에서 10년 이상 뛰어온 포스가 풍긴다. 그러고 보면 자기 분야를 끝내주게 잘하는 대머리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하림부터 그림 그리는 재수 작가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그들의 반짝 빛나는(?) 재능의 원천은 도대체 무엇인 걸까? 악마와의 거래에서 머리카락 대신 빼어난 능력을 얻기라도 한 걸까?
#6.귀여움
설쌤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발톱을 깎고 있길래 뒤에 서서 지그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색의 반들반들한 아치 모양이 참 닮았더랬다. 설쌤과 엄지발가락 말이다. 그 얘기를 하면서 좀 놀렸더니 설쌤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좀 새초롬해졌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항상 더 짓궂게 놀리게 된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감정이 일상의 단위로 쪼개지고 쪼개지면 그게 바로 귀여움 아닐까. 결혼한 여자 선배들도 남자는 멋있는 것도 필요 없고 섹시한 것도 한순간인데 귀여운 건 평생 간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매일 봐도 또 새롭게 좋아지는 구석이 있다. 그렇게 매일 봐도 늘 새로운 것 중 하나는 출근 전에 오래도록 바라보다 나오는 잠든 설쌤의 얼굴이다. 동그라미 안에 가느다란 선 몇 개로 이루어진 그 얼굴 안에 온 세상의 평화가 다 담겨있다. 오늘 하루를 살며 꼭 지켜내야 하는 대상이 있다면 바로 그 평화로운 표정이겠구나 한다. 내일 또 저 표정이 둥근 얼굴 위로 떠오를 수 있게 열심히 살아야지. "슈퍼맨이여 지구의 평화를 위해 싸우세요. 나는 저 둥근 얼굴 속 평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렵니다!"
이 여섯 가지가 대머리와 함께 살면서 관찰한 소소한 특징들이다. 나름의 애정을 담아 기록한 보고서지만 혹시 또 설쌤이 자길 놀리는 거 아니냐며 샐쭉해지면 어떡하지? 하지만 대머리를 대머리라고 놀릴 수 있는 건 대머리 짝꿍만의 특권인걸! 아주 개인적인 애정이 조금 더 세상 공통의 영역이 되길 바라며, 보고서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