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부장은 늘 커피값을 낸다. 강등된 지 1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동료들이 팀원 같다. 실무를 부탁할 일이 많지만 연륜은 어디 가지 않았는지 여전히 그들은 B부장을 믿고 따른다. 매번 밥과 커피를 사야 하는 것만 빼면 나쁘지 않다. 동료들도 식당 문을 나설 때면 으레 B가 계산서를 집어드는 걸 당연하게 느끼는 듯하다. 오늘도 K대리는 능숙하게 터치펜으로 음료 리스트를 받아 적어 카운터로 간다. 어쩜 이렇게 빠릿한지. 커스텀 옵션이 잔뜩 들어가 길기도 한 이름이 5명의 입에서 제각각 흘러나온다. 수량도, 메뉴도 틀림없이 적어내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그래도 괜찮다. 카드 한 장이면 실무능력이 없어도 모든 게 해결된다. 원래 나 정도 되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여는 거다. 직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그는 음료를 기다리며 동료들에게 현명한 직장인 마인드에 대한 썰을 푼다.
"G과장, 그거 아나? 요즘 나무 값?
전국 산 돌면서 좋은 나무만 찾아도 돈 된다더라.
나는 나중에 산사람 되련다. 허허"
빠릿한 K대리는 터치펜으로 '조경수 채취'를 재빨리 검색한다.
'음, 나무를 좀 배워둬야겠는데.'
그리고 한 술 거든다.
"우리 회사 출입보안이 좀 심하잖아요.
저 아는 사람은 우리 회사 출입권한 따내서 이 넓은 단지에떡 배달로만 수백 번다하더라고요.
역시 사람은 틈새시장을 잘 찾아야 한다니깐요"
K의 직감은 괜찮은 편이다. '우버'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본인이 승차공유 플랫폼을 구상했었다는 영웅담은 자면서도 외울 정도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때 타이밍만 잘 잡았으면 마크 저커버그는 저리 갈 정도일 거라나.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K는 작년에 무려 3개의 자격증을 따 두었다. 언제 써먹을지 모르니 미래에 대한 투자라 생각하고 수백만 원짜리 민간자격증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K대리는 B부장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B는 능력 있는 팀장이었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이었다. 그러던 그가 작년 면팀 조치를 받고 공식적으로 K와 동등한 '팀원' 신분이 되었다. 강단 있는 성격은 못 되었지만 이곳을 25년간 시조새처럼 지킨 사람이다.
내가 이제 와서 어딜 가겠나, 그치만 자네는 한창이잖나, 회사만 너무 믿지 말고 살 길은 자네 스스로 찾게.
K와 소주잔을 기울이던B부장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리고 K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B의 오른팔처럼 일하던 K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K가 회사 밖으로 눈을 돌린 건 그 무렵이었다.
K는 운이 좋았다. 취직한 회사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기업에 인수되면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든든한 명함이 되었다. 대기업 위상에 맞게 연봉과 복지 수준도 덩달아 높아졌다. 하지만 훌륭한 후배들과 쟁쟁한 경력 사원들이 치고 올라오자 K는 늘 불안했다. 롤 모델로 삼던 B부장이 강등되는 모습을 보니 이대로 있다가는 똑같이 초라한 말년을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밤, 야간을 마치고 퇴근한 K는 어슴푸레한 블루라이트속으로 빠져들어갈 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탁탁탁'키워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발자국 소리처럼 조용한 방을 울렸다.
'부업으로 월 천 벌기', '사이드잡으로 월급만큼 버는 법', 'N잡 프로젝트' 등 듣기만 해도 설레는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내가 잘하는 게 뭐지? 하는 고민도 곧 사라졌다. 왕초보가 초보를 가르친다는 컨셉으로 퍼스널브랜딩에 성공한 사례는 차고 넘쳤다. 여러 사례를 보고 나니 이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은 금방 사그라졌다. 게다가 그들이 팔고 있는 재능은 '매일 가계부 쓰기 모임', '글쓰기 인증루틴 만들기'처럼 큰 기술이 필요해보이지도 않았다. K정도 스펙이면 뭘 해도 될 것 같다는 자신감도 살짝 품게 되었다. 더구나 이건 무자본의 초 저 리스크 상품이라구!! 못 할 이유가 없지!
K는 여러재능판매 플랫폼을 비교해 본 후 가장 사용자가 많아 보이는 곳에 판매자 계정을 만들었다. 권한이 승인되었다는 메시지가 즉시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