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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Lisa Sep 28. 2023

동생을 기다린다.

하와이 둘째 날 오후

엄마의 재혼으로 나와 내 동생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생겼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이곳에서 나고 자라 한국말도 어눌한 동생들과 수줍게 영어로 대화했었다. 문화적으로 우리 엄마 이름을 그냥 부르거나 미시즈(Mrs.)를 붙여 예의 있게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미국 아이들이다. 하지만 동생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우리의 엄마 (our mom)' '우리의 아빠 (our dad) '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 냈다. 직접적으로 호명하지 않을 때는 새엄마 (stepmother)라는 단어가 있고 아니면 말 그대로 ‘아빠의 와이프’라고 지칭하면 될 것이었다.


‘나의 엄마’도 ‘너의 엄마’도 모두 ’우리 엄마‘인 한국에서는 ‘our mom’에 담긴 동생들의 창조어(?)에 담긴 배려가 바로 와 닫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my mom‘, ’your mom‘이 확실히 구분되는  미국에서 ‘our mom’ 은 정말 한 명의 엄마를  함께 공유하는 단어다. 세 명의 동생들 정서상 ‘our mom’은 수용의 표현이다. 사실 난 처음에 ‘아버지’라는 호칭도 버거웠고 엄마는 그런 내게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뭐라 했다. 그는 엄마의 남편일 뿐이지 나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라는 호칭마저도 상황상 어쩔 수 없는 경우만에만 뱉어낸가.


그런 민감한 부분을 세명의 착한 어린 동생들이 나서서 포용하고 있었다. 나와 내 동생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친아빠 my dad와 공유하는 our mom, our dad가,  세명의 동생들은 친엄마 my mom, 허용하는 our dad, our mom이라는 호칭들로 확장되었다. 나에게는 ‘큰’이 붙었다. 큰 언니, 큰누나. 그 착한 아이들과 매번 my, your, our를 섞어 부르다 혀도 머리도 마음도 꼬여 짜증이 나곤 했다. 나의 엄마(My mom), 친정엄마라는 존재도 부정하고 싶은 심정인데 그 아이들과 다정하게 '우리 엄마'라 부르려니 정말 혈압이 올랐다. 피붙이 동생도 피 한방을 썩지 않은 동생들도 모두 착하다. 나만 불뚝 성질이 있다.


그렇게 새아버지는 엄마의 남편에서 나의 착한 세명의 동생의 아버지로 심리적으로 더 부담스러운 간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더욱이 미국식 원리원칙에 철저한 세명의 동생들은 졸업을 하고 직장에 취직하거나 진급할 때면 꼭 나와 '내 동생'까지 신원조사 대상으로 올렸다. 이제는 직급이 높아져서 우리도 백그라운드 체크가 필수적이라지만 처음엔 굳지 왜 우리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남처럼 살아도 그만인 우리 다섯 명은 그렇게 법적으로 까지 얽히고설켜 가족이 되었다. 네 명 모두 내 동생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피붙이 여동생은 특별하다.


어려서부터 엄마보다 날 더 따르던 내 껌딱지 순둥이 '내 동생'은 미국에 오면서 심하게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그때 처음 우리에게 거리가 생겼다. 내가 결혼하면서 이동거리가 덧붙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시간적인 차이가 더해졌다. 그리고 동생이 군인인 제부와 결혼하여 멀리 떠나 남남처럼 지내기도 했다. 그땐 카톡도 없을 때였다. 한국이면 아무리 멀어도, 서울에서 땅끝마을까지도 차로 6시간이다. 하지만 미국은 직항 비행기로 대륙을 횡단하는 시간이 그쯤 걸리며 직항이 없는 경우도 수두룩 하다. 미국은 그런 나라다.


우리는 그렇게 결혼 이후 떨어져 지내며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오고 갔다. 열 살 차이 나는 우리 집 큰애와 동생네 막내 사이에 쪼르륵 세명의 아이들이 있으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못 보는 동안 어린 조카들이 훌쩍 자랐다. 마지막 봤을 때 초등학교 5학년 둘째 여자아이는 조숙해져서 쑥스러워하며 내 곁에 오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우리에겐 만회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와이 사는 남동생의 휴가와 다섯 아이들의 개학에 맞추어 가능한 길게 여행하자 합의했다. 그렇게 개학이 빠른 동생네는 열흘 우리는 보름을 갑작스럽게 계획했다. 통보와 같은 여행 스케줄에 남편과 제부는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우리는 호재를 불렀다. 오랜만에 자매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고 저녁에는 남동생에게 애들을 맡기고 둘이 나가 놀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동생과 온종일 붙어 다니며 먹고 놀고 옆에 나란히 누어 수다 떨다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뜨고 이불속에서 까르륵거리던 시간이 아마득하다.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을 떠난 이후 한 번도 없었다.


'내 동생'이 오늘 하와이로 온다. 조금만 기다리면 조카들을 데리고 내게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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