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첫날, 다이아몬드 헤드
이곳의 첫 해돋이를 보고 이른 아침 하와이 무스비를 먹으로 카페로 향한다. 앉을 테이블도 없이 도시락을 늘어놓은 작은 선반 위로 주문을 받는다. 우연히 찾은 이 집이 맛집인지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대기번호표를 뽑아 한참 기다린다. 우선 허기만 달래고 집으로 돌아가 아침 산책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괜찮은 식당에 가자고 의견을 모은다. 하지만 메뉴를 받아 든 아이들은 그 다양함에 마음을 빼앗겨 정신없이 주문한다. 골고루 고른 주먹밥도 모자라 도시락 박스까지 많이도 산다.
그런데 이걸 어디서 먹는단 말인가. 결국 바다가 야자수 아래에 자리 잡는다. 비치우산은 물론 앉을 의자하나 없이 쨍쨍 내리쬐는 태양아래에서 모여 앉는다. 모래 위에 놓지도 못하고 주먹밥과 도시락을 껴안듯이 몸을 구부정하게 먹는다. 엄마마저 방금 모래밭에서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꼬질한 차림으로 아이들 옆에 주저앉아 주먹밥을 입에 넣는다. 마트 카트 하나만 옆에 있다면 우리는 영락없는 하와이 홈리스 가족 같다.
한참을 그렇게 여행객들 사이에서 추접스럽게 먹는다. 비닐봉지 안에 마지막 용기까지 담아 만족스럽게 일어난다. 우리는 이 아침을 특별하지 않게 보낸다. 외할머니집에 놀러 간 아이들이 동네 쏘다니며 이웃 어른들에게 "저기 마켓뒤에 사는 누구 집에 놀러 왔어요" 인사 다니듯 그렇게.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진 한가한 집 근처 바닷가를 시작으로 호텔과 리조트가 즐비한 북적이는 와이키키까지, 집 근처 아침 산책 나온 듯 낡은 슬리퍼를 끌고 늘어진 운동복바람으로 여기저기 구경 다닌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별것 아닌 것 같은 그런 것들을 나는 꿈 꿔온 것 같다. 집 앞 길목의 동네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사 먹듯 길거리 트럭에서 타코를 사 먹는다. 쓸데없이 1불도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듯 집에서 챙겨 나온 물병을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그래도 타로 반죽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튀겨 금가루를 뿌려주는 작고 도넛은 참을 수 없어 하나씩 사 먹는다. 비싼 가격에 맛만 보고 뒤돌아선다. 이 시간이 참 좋다.
그래도 남들이 다 간다는 Diamond Head (다이아몬드헤드) 하이킹을 계획한다. 관광 밀집지인 와이키키에서 가장 근접한 주립공원으로 바다 위에 떠있는 듯한 231m 높이의 거대한 분화구를 오르는 길이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오하우 하이킹 코스 중 유일하게 입장권과 주차권을 예매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늦은 4:00- 6:00 입장 시간에 정상에 올라 저물어가는 해를 보고자 집을 나선다. 와이키키에서 30-40분 거리, 우버를 탄다.
하와이 첫날, 우리의 첫 우버 아저씨 파비아노는 매우 유쾌하고 자상하다. 하루 6-8시간 개인 운전사로 관광 안내도 해주신다며 손님이 원하면 차에서 기다리지 않고 바다로 산으로 함께 놀기도 한다며 입담 좋게 어필한다. 같이 돌아다니면 정말 깔깔거리며 하루가 즐거울 것 같아 그의 전화번호를 받는다. 마지막 입장 시간 4시가 다가온다. 주차장권은 사지 않아 입구보다 좀 거리가 있는 무료 주차공간에 내려 서둘러 걷기 시작한다. 저기서 파비아노가 계속 손짓을 한다. 우리도 멈추어 같이 손을 흔든고 또 손을 흔들고 돌아선다.
혼잡한 터널 중간에 파비아노가 아무렇게나 정차하고 우리에게 다시 타라고 한다. 창밖으로 손가락의 중간 세 손가락을 감싸 구부리고 엄지와 약지를 펴서 흔들며(하와이 인사) 샤카를 한다. 아무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우리를 기다려준다. 천천히 걸어가다 입구에 제시간에 도착 못하고 돌아 내려올까 걱정이 되어 왔단다. 입구 앞에 세워주고 다시 번잡한 길로 돌아간다. 창박으로 손이 내밀고 하와이의 매직 제스처 샤카를 흔들며 기분 좋게 내려간다. 하와이 이곳 사람들은 친절하다. 어딜 가도 '오하나'와 '샤카'면 다 허용된다.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입구를 통과하고 멀리서 보던 멋진 산세 안으로 들어온다. 산으로 위장한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높은 산은 성벽이 되고 그 벽을 위에서부터 둘러싼 구름이 또 하나의 보호막을 만든다. 탁 트인 그곳에 잘 닦인 포장도로를 사이로 연녹생의 봄 잔디가 천천히 모래사장 색의 평야로 이어진다. 하와이의 열대우림이 아닌 건조한 원시적인 고목들이 뿌리를 내리듯 가지를 뻗고 있다. 자연적이며 비현실 적인 느낌이 블랙 팬서 속 가공의 국가 와칸다에 온 것 같다.
다행히 서늘하다. 산행에 바람 부는 이런 날씨는 축복이다.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급경사의 계단이 나타난다. 과묵한 셋째가 앞에서 나를 살피며 속도를 조절하고 뒤에서 둘째가 속사포 잔소리로 나를 힘껏 밀어준다. 중간 턱에 산 넘어 탁 트인 바다와 섬들이 보인다. 힘들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둘째의 독촉을 받는다. 마주한 벤치에서 남자 친구의 무언의 압력을 받고 있는 지친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서로 각자의 보이들을 눈으로 흘기며 소리 없이 욕을 나눈다. 그리고 힘을 내어 다시 올라간다.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가 보이고 터널이 나온다. 전망 좋은 그곳에 벙커가 숨어있다. 미군은 평화로운 이곳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며 무엇을 관찰하고 있었을까? 나 같으면 깝깝한 벙커에 무의미하게 들어가 있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좋은 곳에서 춤추고 노래했을 것 같다. 하늘이 푸른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한다.
친구하나 없이 혼자온 여자들이 종종 눈에 띈다. 나는 등산, 여행을 혼자 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다. 그래서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음이 억울했다. 혼자 세상을 여행하는 여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라 생각했고 선망했다. 저쪽 여리여리한 동양 여학생이 혼자 바다에 심취해있다.
그동안 나는 뭐 하며 살았나 싶다. 왜 친정에 연연했을까? 세상에 구경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와이까지 혼자 여행하는 여자도 이렇게 많은데, 나는 왜 집에서 서러워 하고 있었을까. 남편은 같이 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자신과 상관없이 하는 일에는 반대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내가 주장했다면 근심걱정에 잠을 못 이룰지언정 재택근무하며 아이들을 봐줬을 것이다. 내가 용기가 없었던 거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려가고 한산해진 정상에 우리들만 남는다. 여름의 태양은 여전히 하늘 높이 떠 있다. 6시에 입구 문을 닫는다고 한다. 주차장 입구겠지만 우리는 오늘 이곳이 처음이라 더 버티지 못하고 내려온다.
올라올 때 보지 못한 정경을 마주한다. 남동생이 일을 좀 일찍 끝내고 우리를 데리러 밖에 와있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해질녘 바닷가로 향한다. 강렬한 태양이 바다로 급 하강하여 그 열기를 식히듯 뜨거운 주황빛은 빠르게 옅어지며 어두움으로 자취를 감춘다. 해가 진다. 내일 또 일찍 떠오르기 위해.
우리는 하와이 로컬 브루어리(Brewery)로 향한다. 달구어진 내 마음의 열기는 식히기 위해. 내일 다시 뜨거운 태양을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