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셋째 날, 마노아 폭포 / 리온 수목원
하와이 첫날부터 사춘기 중증 막내와 마음이 통했다. 해돋이에 누구보다 우린 진심이었다. 여동생과 어린 조카들이 어제 합류하며 우리의 일정은 느슨해졌다. 하지만 우리 둘은 모두 자고 있는 이른 아침 눈빛만으로 같이 일어나 조용히 문을 나선다. 말도 필요 없이 우리는 바다로 향한다. 아이가 앞장서서 간다.
사자 갈기 같은 머리를 하고 제발 그만 입었으면 좋겠는 꽉 끼는 반바지를 입고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앞에서 걸어 나간가. 초등학교 이후 신발 한 짝이 나무 위에 걸리거나 밑창이 완전히 분리가 될 때까지 낡고 더러운 신발을 훈장처럼 소중히 여긴다. 이건 아이의 성향인 것 같다. 하지만 머리는... 작년 봄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허리를 넘게 기른 머리를 어깨까지 잘랐다. 햇수로 몇 년을 길렀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내 인내의 증표다.
아들 셋을 키우며 그냥 기다리면 스스로 미용실에 데려가달라 부탁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이마에 커튼을 친듯한 스타일에 집착했다. 눈을 가리고 땅을 보고 다니는 큰 애 때에는 안달을 했었다. 그땐 나도 사춘기 아들이 처음이라 우리 애가 정말 이상한 줄 알았다. 둘째는 빅뱅의 지디 머리에 꽂혔었다. 옆과 뒤는 밀고 앞 머리만 길고 빨갛게 물 드린 스타일이었는데 문제는 손질도 하지 않고 오로지 앞머리만 옆으로 삐쭉삐쭉 길러 한쪽 눈만 가리고 다녔다.
저러다 정말 애꾸눈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 사춘기는 그런 나이다. 이삼 년 참아내면 어느 날 아침 머리를 긁적이며 스포츠머리 군인 머리 할 것 없이 짧게 자르고 싶다 하는 날이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 막내는 여전히 흙바닥에 구르다 일어난 것 같은 사자의 머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 헝클어진 머리를 쫓아 걷는다. 무지개를 발견한 아이가 해맑게 웃는다. 오랜만이다.
아이가 웃는 얼굴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초롱초롱해진 눈빛이 얼마만인가. 집으로 돌아와 늦게 일어난 식구들에게 해돋이 산책 나갔다 무지개도 보았다 자랑한다. 하지만 남동생이 모두를 깨워 아파트 옥상 45층으로 데려가 커피를 마시며 손에 잡힐듯한 무지개를 보았다고 한다. 억울하다. 우린 반쪽자리 무지개를 쫓아가며 보다 오는 길인데. 그렇게 모두의 아침이 시작된다.
바다와 산이 화합하는 하와이. 오늘은 우버를 타고 바다가 아닌 산으로 육지 안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낳고 자랐지만 마노아 폭포 트레일(manoa falls trail)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람 좋은 대만 미국인 우버아저씨와 친구가 된다. 덜컹이는 차속에서 지구과학을 배워본다. 대륙 이동. 여러 개의 판들로 이루어진 지구 표면이 화산 활동으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활화산 지역 하와이의 도로는 아무리 공사를 해도 보수가 안되다는 얘기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자신이 아무리 조심히 운전해도 이 도로는 어쩔 수 없다는 마무리에 큰소리로 함께 웃는다.
달리는 창밖으로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섬세한 레이스 양산을 하늘 높이 펼쳐 타들어갈 듯 내리쬐는 태양으로부터 대지를 식물을 보호하는 듯하다. 정작 나무 자신은 태양에 이끌려 오랫동안 그 만을 향해 손을 뻗어 오른 듯하다. 아름답다. 입구를 지나 자갈길을 따라 들어가면 열대우림이 우리를 환영한다. 대자연 속의 소자연을 감상하며 어제 내린 비로 미끄러운 진흙길을 따라 폭포를 향한다.
산행은 역시 쉽지 않다.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숨을 내쉰다. 숲의 에너지를 들이마시고 다시 산을 오른다. 폭포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뒤로 하고 다시 땅으로 돌아온다. 이미 지친 아이 배가 고픈 아이 아직 힘이 남아 산 정상으로 달음박직 하고 싶은 아이들을 데리고 바로 옆 리온 수목원(Lyon Arboretum)을 둘러본다. 마노아 폭포의 유명세에 밀려 기대 없이 들어간 그 공간에 매혹된다.
화산의 여신 펠레가 산 정상에서 바다로 흘려내리는 용암처럼 원시림의 거대한 뿌리들이 액체처럼 땅을 타고 내려오다 고체화된 듯 구불구불 언덕을 타고 생명 줄기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와이 대학이 조성한 리온 수목원의 초입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온다. 돌멩이 하나 작은 식물 한 포기마저 깊은 고민으로 제자리를 잡은 듯하다.
마치 인간의 예술적인 섬세함으로 거대한 자연을 연구용 정원으로 조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숲으로 자연으로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위대한 신의 손길만이 남는다. 열대우림의 습기가 자연의 냄새를 뿜어낸다. 바다의 미스트처럼 적셔온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나 자신을 잃으며 나른해진다. 갑자기 굵은 빗줄기 쏟아진다. 저 멀리 산등성은 납빛이 되고 구름 같은 안개가 땅으로 땅으로 점점 내려온다.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른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줄기에 놀란 새들이 폐부가 찢어지게 괴성을 지른다. 하늘의 새들도 자연의 변화에 불안을 호소하는데, 어렸던 우리들, 나와 동생들은 그러지 못했다. 부모라는 집이 흔들리고 무너져가고 있을 때 정작 그때는 두려움에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쏟아지는 폭풍우 안에서, 피난처를 찾지 못하고 그대로 맞고만 있었다.
'우리의 부모들'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시뻘건 용암을 분출하며 지반을 흔들어댈 때 우리들은 그 언저리에서 검은 화산재에 덮여 그대로 시커멓고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우리 다섯 모두 지금의 내 아들들보다 어린 나이였다. 침묵하며 소리 없이 울던 우리들은 뒤늦게 산발적인 순서로 비명을 지르며 한 번씩 무너졌었다. 그렇게 어린 내면의 아이들로 몸만 크고 늙어, 몸에 솟아난 하얀 머리카락처럼 하얘진 가슴의 상처를 품고 이곳까지 함께 흘러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