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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Lisa Oct 05. 2023

바다, 결혼

하와이 다섯째 날, 노스 쇼어 1

9월의 날 좋은 주말, 커다란 잎이 늘어진 야자수들이 전봇대같이 줄 맞춰 해변가에 쭈욱 줄지어 서있는 바닷가 초입에서 한 남자를 처음 만난다. 산에서 해가 떠오르는 캘리포니아의 새벽 바다는 서늘하게 푸른다. 구름 없는 하늘과 잔잔한 바다가 경계를 무너트리고 몽롱한 거대한 공간을 만든다.


그 남자와 함께 쪽배를 타고 안으로 들어간다. 바다의 비릿한 짠 내가 심연에서 올라오고, 허공에서 하얀 바다 새들이 힘차게 날갯짓한다. 출렁이는 파도에 넘실거리는 작은 배에서 그와 나도 같이 흔들린다. 아직 흐릿하게 별들이 하늘을 반짝인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로 쪽배를 타고 그 남자와 노를 젓는다.


2001년, 새벽 바다에서 남편을 만났다. 그와 내가 앞자리에 그를 데려온 친구와 내 동생이 뒷자리에 옹기종지 앉아 낚시를 했다. 어린 시절 아빠를 따라 낚시를 다녔지만, 바다낚시는 처음이었다. 캘리포니아의 바다도 아빠가 아닌 남자와의 낚시도 모두 처음이었다. 우리의 작고 낮은 나무배는 멀리 나가지 못하고 물 굽 안에서 잔잔히 떠다니며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 남자와 작은 배에서 낚시하듯 아기자기한 삶을 꿈꾸며 결혼한다.  


그렇게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우리의 결혼은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많이 달랐다. 한국인 이민자가 딱 두 가정뿐이었던 1970년도 중상층 이상의 백인동네에서 성장한 남편과 시집 식구들의 삶은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군인출신의 폭력적인 시아버지는 분명 모두를 힘들게 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어머니는 신앙을 붙잡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며 헌신했다. 그런 시어머니의 영향으로 남편도 매사에 감사하는 근면 성실한 순종하는 '주의 종'으로 교회에서 성장했다. 주 칠일 밤낮없이 노동하는 이민자의 말썽 안 피우고 공부 잘하는 자랑스러운 '착한 아들'로 자랐다.  


아마도 그런 그들에겐 난 근본적을 못마땅했던 것 같다. 결혼하지 마자 미팅이 많던 남편을 위해 클래식한 유럽스타일 슈트와 고급 정장 구두를 선물했다. 이른 아침부터 따듯한 밥과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준비했다. 내게 당연한 그런 사랑의 표현들이 그들에겐 허영스럽고 사치스러웠던 것 같다. 나는 그들의 신앙적인 잣대로 교화대상이었다.


우리가 신혼이었을 때, 시누는 전쟁 중 폭탄이 떨어지는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국경을 맨발로 넘어 다니는 선교사였다. 내가 아무리 새벽기도를 하고 이 안타까운 시집식구들을 보필하려 해도 나는 한낯 믿음이 부족한 정죄대상이었다. 또한 한국에서 온 이혼가정 며느리가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 눈에 시집은 이혼한 우리 집보다 더 심각했다. 지시와 불평 그리고 요구사항이 대화의 전부였다. 일 그리고 교회 외에의 삶이 없었다. 아마도 이건 많은 초기 이민자 가정의 모습일 것이다. 거실에서 라디오와 티브이를 동시에 틀어놓은 시아버지는 그것도 모질라 계속 잔소리를 한다. 시어머니는 집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안방에서 성경을 읽으며 보낸다.


남편은 자신의 엄마보다 교회에 덜 미친 하지만 그녀처럼 청교도적인 여자를 기대했던 것 같다. 나는 친정아빠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의 소박한 사람을 원했었다. 하지만 아빠처럼 따뜻하고 낭만적인 남자를 꿈꿨던 듯하다. 우리는 서로를 착각했다.


처음 만난 날 남편은 원만한 남자보다 적극적으로 낚시하는 내가 독립적인 것 같아 멋있었다 한다. 나는 그날 연한 회색의 메트로폴리탄 아트 뮤지엄 티셔츠에 제대로 면도도 하지 않은 채 순수하게 웃는 그가 예술적으로 보여 맘에 들었다. 집이 아닌 작은 보트에서 살고 싶은 로망이 있다는 그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히 속았다. 그러고 보면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의 주인공 '품위 있는 집사' 스티븐스는 내가 아닌 남편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가정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반석 위에 세우고 돌보는 것이 최우선이기에 다른 소소한 일상, 정서적 유대, 삶의 여유도 용납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


난 그런 스티븐스를  흔들다 꼼짝하지 않는 그를 떠나버린 동료 켄턴 양과 비슷하다. 남편의 서재를 두드리고 얘기해 보려 귀찮게 해 보고 싸움도 걸어보고... 그리고 포기하고 떠나려고도 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서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변함없이 여기고 있다.


스티븐스는 끝까지 충직한 집사로 남는다. 내 남편도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 볼 것은 스티븐스를 떠난 켄턴 양이다. 그녀는 욱하는 마음으로 그를 떠나 다른 삶을 사는 동안 행복하지 못했다. 아마도 스티븐스 옆에 남아있었어도 그녀는 분명 행복하지 못했을 것 같다. 더 불행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는 방황을 멈춘 것 같다. 남아있는 그녀의 삶을 더 이상 허비하지 않으려 한다. 하루 중 가장 좋은 저녁,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다리 쭉 뻗고 즐겨야 하는 해질녘을 누리려는 듯하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아름다운 바닷가 석양 앞에서도 달링턴 홀에 돌아가 모든 역량을 바쳐 직무에 전진하여 주인이 감탄하길 소망하는 스티븐스와의 남은 나날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스티븐스 같은 남편을 그의 서재에 남겨두고 세상에서 가장 큰 대양에 떠있는 작은 섬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그때도 지금도 태평양은 눈부시다. 하지만 팔딱거리는 젊은 열정으로 정오의 타는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첨벙거리던 예전의 나는 아니다. 이젠 비치우산을 두 개 붙여 만든 넉넉한 그늘 안에 누워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저쪽 높고 커다란 바위에서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푸른 바다로 힘차게 뛰어내린다. 남편과 처음 만났던 날의 캘리포니아의 바다도 눈앞에 펼쳐진 바다도 여전히 아름답다. 지금도 여전히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보다 낭만적인 아기자기한 삶을 꿈꾼다. 이 채워지지 않는 낭만의 결핍이 불화 슬픔 외로움으로 이끌었지만, 난 아직도 그렇다.


남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이 하나 없는데 나의 마음만 이랬다 저랬다 안달하고 있었나 보다. 몸을 일으키고 우산 그늘밖으로 나와 바다를 마주한다. 바닷바람이 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저 멀리 펼쳐진 에머럴드 바다가 압센트의 환각을 부른다. 나를 부른다. 하와이의 강한 햇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껴입은 하얀 천들 모자 선글라스를 벗어던진다. 바다로 달린다.


다시 삶의 열정을 입고 마흔의 바다로 첨벙 뛰어든다. 파도가 나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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