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여섯째 날, 노스 쇼어 2
큰 아이는 자궁에서부터 내 불안의 진동에 많이 흔들렸다. 임신 막달에도 속상함을 못 참고 대책 없이 집을 나와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한참을 울었던 철없던 나는, 태중의 아이를 임신 내내 많이 힘들게 했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스트레스는 나에게 다시 심한 입덧으로 되돌아왔다. 먹지도 못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의사의 권고로 침대생활로 이어졌다.
아이는 먹는 것에 맘에 안 들거나 신선한 바람이 쐬고 싶은 때이면 배가 찢어지게 발차기를 하거나 숨이 턱 막히게 몸을 들썩이며 불만을 표출했다. 그렇듯 큰 아이와는 나는 탯줄에 의지하여 유난스러운 유대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아들 셋 중, 큰 아이는 항상 내편이었다.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 아이가 이젠 대학생이 되었다. 의사가 되어 삼촌처럼 아프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싶다고 한다.
방학중에도 낮에는 학교 조교로 저녁에는 소방서에서 야근하며 응급 의료요원 트레이닝 중인 아이가 나의 소원을 들어주듯 어렵게 시간을 내어 오늘 내게로 날아와 주었다. 타지에서 만나는 아들은 왠지 더 애틋하다. 동생들보다도 어리숙하던 녀석이 못 보는 사이 제법 커서 어른이 된 것 같다. 듬직해졌다. 어제도 앰뷸런스를 타고 나가 고생하고 쉬지도 못하고 이렇게 바로 와준 핼쑥해진 아이가 고맙다. 아이가 하루 푹 쉴 수 있도록 바다로 향한다.
아이들이 바다로 뛰어들어간다. 나도 따라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진다. 깊지 않은 평온한 바다에 눈을 감고 스르륵 빠져들어 간다. 귓가에서 울리는 소음이 메트로놈같이 일정한 진동으로 울린다. 몸을 웅크려 앉아 그 리듬에 몸을 맡긴다. 나 역시 엄마의 양수에 의지하여 그녀의 참을 수 없는 울분에 흔들였었다. 그녀의 중얼거림이 참 가여웠었다. 그녀의 울음이 애달프고 괜히 미안했었다. 그래서 그 눈물에 너무 오래 많이 휩쓸려 다녔다.
엄마는, 내 옆에 있어줘야 할 기간을 셈하고 정확히 채우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아마도 수학을 잘하는 똑똑한 엄마는 여자로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와 그래도 엄마로서 자리를 지켜야 하는 도덕적인 기간을 치밀하게 계산한 것 같다. 엄마가 결심한 그 절댓값이 지금의 내 나이다. 그때 나는 어리바리한 우리 큰 아이 나이였다. 엄마 딸이라는 입장의 경계에 서서 그녀의 지나간 시간과 나의 시간을 돌아본다.
보고 자란 것이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매정하게 떠나던 엄마를 원망하며 엄마처럼 떠날 수 있는 시간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엄마도 지킨 기본적인 도리를 나도 지키기 위해 막연히 버텨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젠 딸로서의 울분과 여자로서의 슬픔을 동시에 마음에 품게 되어 내 나이였던 엄마의 선택을 원망도 이해도 할 수 없다.
더 깊이깊이 물속 끝 바닥으로 떨어지고 싶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하와이의 푸른 바다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다.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엄마! 엄마! 아이들이 부른다. 바다 어디에선가 나를 부른다. 아이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그들의 웃음소리 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더한 사랑이 있을까. 이 바닷속에서 내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는 것 같다.
내 마음에 부유하던 질문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엄마는 아빠와 나 사이를 왜 이간질했을까? 엄마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는데 왜 내가 아빠를 마음껏 사랑하지도 못하게 아빠를 왜곡했을까?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며 엄마가 폭로한 아빠는 무능력한 가장일 뿐 아니라 가정 폭력범이었다. 하지만 난 그런 아빠를 경험한 적도 본 적도 없다.
혹시나 주의 깊게 살피던 엄마 몸에서 나는 어떤 수상한 멍과 상처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겨울엔 빙판길에 넘어져 멍든 엄마의 둔부와 다리에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의 비밀스러운 폭로 외에는 흔적 증인 다른 피해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의 짧은 오른손 약지 끝이 오래 동안 맘에 걸렸다. 혹시 아빠가 상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묻지도 못하고 엄마의 손가락을 볼 때마다 가슴 아팠다. 두려웠다. 엄마의 어릴 때 상처였다. 나중에 알고 안도했다.
아직도 난 진실을 모른다. 부드럽고 살가운 서울 남자인 아빠와 과묵하고 남성적인 성향의 부산 여자인 엄마 둘의 관계는 누가 봐도 아빠가 약자였다. 딸을 사랑하는 페미니스트였던 아빠의 영향이었을 수도, 엄마에게 세뇌당해서였을 수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꼈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약자이자 여자인 엄마 편에 섰다. 그렇게 나는 아빠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아빠를 의심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엄마가 재혼해서 나를 떠나갔을 때 나는 엄마도 아빠도 없는 고아가 되었다. 이제와 이혼한 부모의 진실 공방을 할 수는 없다. 그저 난 여전히 슬프고 불안하고 가끔 악몽을 꾼다. 그렇기에 난 여전히 엄마를 용서할 수가 없다.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아빠에게서 받은 그 사랑이 너무나도 그립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