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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Feb 24. 2024

우울증이라는 페르소나

색상표에는 없는 색

페르소나(persona)
-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다가 벗었다가 하는 가면을 일컫는 말.
- 심리학 용어로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 쓰는 가면"을 의미한다. 깊게 들어가면 SNS에서 사용하는 프로필 사진이나 어떤 인물이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특정 고유 이미지.
- 영화계에선 어떤 감독이 자신의 분신 혹은 상징처럼 애정하는 배우를 뜻하기도 함.
출처: 나무위키


나는 ‘색(色)’이 없는 사람이다.


재미도 없고 매력도 없다. 커리어도 없고 경험도 없다.

이렇다 할 ‘나’라는 정체성이 없었다.

일란성 쌍둥이었던 나는 늘 언니와 세트로 생각되었다. 나 하나로 분리되지 못했던 게 너무 싫었다.

’쌍둥이 동생 누구‘로 늘 ‘나’가 아니라는 ‘열등감’이었다. 쌍둥이 뒤에 동생이 붙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고 그냥 나는 쌍둥이 1 혹은 쌍둥이 2였다. 설상가상으로 언니는 나보다 공부도 잘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언니와 다른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 다른 무언가는 잘해야 했다. 그게 ‘일본어’였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 관심이 생겨 공부하고 나니 보인다. 일본어는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열등감’이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처음엔 즐거웠다. 그저 국적이 ‘한국’이었을 뿐이었는데 감사하게도 K-pop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인’이라는 그 자체로 나는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때로는 K-pop 아이돌을 동경하는 이들에게 ‘한국어’를 한다는 것만으로 동경의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그 호기심과 관심, 동경이 나인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그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없어지니 나는 초조했다. 예전처럼 아무 색도 없는 나, 순도 100%의 나로 살아야 하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나의 ‘정체성’ 찾기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정체성은 요가와 채식이었다.

나는 여전히 요가하고 채식한다. 지금 내가 요가와 채식을 바라보는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오로지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요가와 채식이었다. 세상에 요가의 상냥함과 채식의 비폭력을 전할 생각은 없었다. 요가와 채식은 밋밋한 나에게 무늬를 주는 요소였다. 그래서 무리하게 요가의 어려운 자세를 시도하고 다치기 하면서까지 나는 이렇게 고난도의 자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게는 맞지 않았던 극단적인 채식을 하며 채식하지 않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판단하는 일도 있었다.


두 번째 정체성은 술이었다.

우울은 중독과도 맞닿아 있어서 우울증 환자들이 ‘알코올의존증’을 함께 앓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주는 도파민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나도 외로움, 슬픔, 공허함이 들 때 술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 오히려 도파민은 감소한다. 반복적으로 술을 통해 도파민을 증가시키는 경우 우리의 뇌는 술을 통해 도파민이 증가한 상태를 정상적인 상태라고 인지하여 평소의 도파민의 양을 확 줄여 버린다. 그렇게 도파민이 감소하게 되면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기분이 가라앉게 되고 기분을 올리기 위해서 술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원래도 내향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 거기에 우울이 쌓이고 일본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일본인들의 수동성까지 스며 드니 감정을 표현하고 속마음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술은 아주 일시적이지만 나를 외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내 ‘우울한 내향성’을 숨기기 위해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었다. ‘와인’이라는 매개체는 너무도 멋있었다. 와인 라벨에 적힌 외국어들 특히 프랑스어는 시크하고 로맨틱했다. 라이트 바디의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정체성이 제법 맘에 들었다. 그러나 술은 사람을 아주 잠시 나를 환경에 어울리게 만들어 외향적으로 행동하도록 하고 외향적이라고 느끼게 했을 뿐이었다.

그 화학 물질은 나의 그 무엇도 바꾸지 못했다.


나는 ’요가와 채식‘에 심취하고 ’술’에도 중독되어 있었지만 그중 가장 놓지 못했던 것은 ‘우울’이라는 정체성이었다.

그것들은 결핍과 불안을 가리는 ‘페르소나’였다.


이혼과 간호사 데뷔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우울’에 빠졌다. 식욕이 없어 먹지 못하니 자연스레 살이 빠졌다. 통 잠을 못 자니 신경이 곤두섰다. 가족들과 친구들, 애인은 나를 걱정했다. 관심받고 싶었고 사랑이 고팠고 위로가 필요했던 나에게 ‘우울증’이라는 캐릭터는 꽤나 유용해 보였다. ‘우울증‘의 나는 그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나’였다. 내가 놓지만 않으면 ‘우울’은 나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었다. 나는 관심을, 사랑을 위로를 원했다. 그래서 나에겐 ‘우울증’이 필요했다.

나는 괜찮아져도 괜찮아져서는 안 됐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나를 두고 바다로 떠나버린 ’배‘가 알려주었다. 배든 버스든 기차든 ’가리기‘위해 만들어 낸 ‘페르소나’들 뒤에 숨은 나를 그들의 옆에 태워주지 않았다. 나는 ‘페르소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뒤집어쓰고 있는 탈을 벗어던지기로 했다.

나는 고난도의 어려운 자세는 못 하고 명상도 지루해하며 마음에는 고요보다는 요동이 더 많은 요가 수련자이고 만두를 너무 좋아해서 가끔씩 고기만두 1-2개는 먹는 타협하는 비겁한 채식주의자이다.

우울해도 잘 먹고 잘 자는 명랑한 은둔자다.


나는 ’색(色)‘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색’이 없는 게 아니라 ‘색상표에 없는 색’을 가지고 있었다. 명도와 채도가 낮아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의 색은 투명에 가까운 색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색이 쉽게 투사되어 그게 나의 ‘색’이라 믿기도 했다. 선명하고 뚜렷할 색일 필요는 없는데 진하고 싶었다. 그래야 나를 봐 줄거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나를 봐주길 원했고 봐주어야 했다. 나는 관심을, 사랑을, 위로를 구걸했다.

나의 ‘색’은 투명에 가까워 다른 사람의 ‘색’을 함부로 물들이거나 섞지 않는다. 순수하게 나의 ‘색’을 지키고 다른 사람의 ‘색’도 해치지 않는다. 내 색에는 이미 관심과 사랑과 위로가 있다. 그래서 더 이상 구걸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내가 나를 보아준다.


자, 두껍고 무겁고 숨 막히는 탈을 벗고 나가자.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사람은

‘나’다.


페르소나는 없다. 정체성은 없다.

나는 나로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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