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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Feb 17. 2024

똑똑하게 우울하기

우울 공부

세상에서 뭐가 제일 무서울까?


‘모르는’, ‘막연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서웠다. 이것들은 불안과 직결되었다. 나는 불안해서 우울하기도 했다. 나는 내 모르는 불안에서 오는 우울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전략을 세워야 했다. 나는 요가하는 사람이지만 요가에서 말하는 내려놓음받아들임나의 우울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우울에 휘둘리기 싫었고 지기 싫었고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싸우고 싶었고 이기고 싶었다. 여러 전략을 생각하던 도중 내 머리를 스치는 조상님들의 지혜가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무서우면 알면 되고 막연하면 명확하게 하면 되고 보이지 않으면 선명하게 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우울’을 선명하게 명확히 알기로 했다. 우울과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정신과 의사들이 쓰는 벽돌 같은 두꺼운 책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몰라서 우울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우울을 공부한 후 우울이 얼마나 다양한 얼굴로 오래도 내 곁에 머물렀는지 알게 되었다.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우울은 끊임없이 ‘너 우울한 거야’라고 속삭였었다. 그 속삭임은 신체화이기도 했고 과수면불면이기도 했고 폭식절식이기도 했다. 

그래도 알아차리지 못한 나를 위해 우울은 친절히 도 다른 방법을 써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우울은 내 인지력, 기억력, 집중력을 저하시켰다. 업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게 해 실수하게 했고 책을 읽지 못하게 했고 일본어를 독학해서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게 만든 내 암기력을 떨어뜨렸다. 이 종합적인 저하들이 우울해서였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우울을 알고 공부하고 나서였다. 

나는 이 증상들을 ‘멍청병’으로 진단했다. 내가 어리석어서 내가 바보 같아서라고 자책했다. 


오진이 내려진 후 우울은 내게 세컨드 오피니언(Second Opinion, 자신의 병에 대해 주치의가 아닌 다른 의사에게도 의견을 묻는 것)을 얻을 기회를 주었다. ‘멍청병’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사건이 있었다. ‘이혼’이었다. 우울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을 결심하도록 끊임없이 나를 지치게 만들어 소중한 것을 지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는데도 세컨드 오피니언을 얻지 않았다. 

나는 우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뺏기고나서야 어쩌면 내가 ‘아플’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울은 마음에 견고한 벽을 치고 높이 담을 쌓아 올린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을 때 내가 제일 힘들었던 건 사실 도무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마음이었다. 그 색은 무색도 아니다. 회색이다.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어딘가에 섞여버린 색. 불분명한 그 색 속에서 나는 슬픈데 슬프지 않았고 기쁜데 기쁘지 않았다. 감정들을 명명(名命)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감정에는 패턴이 있고 사람은 익숙한 것을 선택한다. 나는 우울이 익숙했기에 우울을 선택해 왔던 것이다. 슬퍼하려면 울어야 하고 기뻐하려면 웃어야 했다. 에너지가 필요했다. 우울하면 무기력하고 힘이 없어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됐다. 나는 그게 편했던 것이다. 편해서 선택했던 것이다.


우울은 정말 총체적 난국의 병이다. 마음만 아프면 될 텐데 우울이 오면 사람은 먹고 자고 씻는 것 같은 기본적인 걸 못 하게 된다. 철저히 심신을 망가뜨린다. 다행히 타고난 결벽증 때문에 씻어 개인위생은 되는 우울증 환자였지만 너무 많이 먹기도 했고 못 먹기도 했고 너무 자기도 했고 불면에 시달리기도 했다. 수면 문제야 너무 자면 낮잠을 줄이거나 알람을 맞추거나 하며 통제를 가할 수 있었고 불면은 수면제를 먹으면 됐다. 하지만 식사 문제는 달랐다. 혼자 사는 나의 식사를 챙길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의식적으로 챙기기 시작하면서 식사가 우울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알게 되어 나는 어떻게 먹을지까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울은 뇌의 신경전달물질들의 영향을 받는다. 뇌의 신경전달물질을 만드는데 중요한 성분은 ‘단백질’이고 '철'부족이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나는 비건(완전 채식)을 그만두고 계란과 생선을 먹는 페스코로 전향했다.

스스로 챙겨 먹는 식사는 나를 우유부단하게 만들었던 우울에게 겁을 줬다. 잔뜩 겁먹은 우울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나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아.
우물쭈물하지 않아.
내가 선택한 거야.

내 전략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현재까지 우울에 대한 내 전적은 백전백패이다. 지금까지 나는 ‘피(우울)’는 알았지만 ‘기(나)’는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한 백전은 ‘피(우울)’와 ‘기(나)’를 조금 알고 시작한다. 


‘피(우울)’은 강적이다. 하지만 많이 겨뤄 보고 많이 져 본만큼 적의 약점도 많이 안다. 이제 ‘기(나)’를 더 많이 알아가면 승률은 오를 것이다. 요즘 차근차근히 ‘피(우울)’를 상대로 1승씩 거두고 있다. 

첫 1승은 수면제를 끊어버린 것 두 번째 1승은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첫 1승이 1승이 2승이 된 것처럼 이 2승이 3승이 될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백승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우울해도 더 이상 지지는 않는다. 

나는 똑똑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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