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약한 희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죽음은, 재탄생의 다른 말이다.
마치, 모든 불꽃이 연소된 자리에 수북이 쌓인 재속에서 불사조가 탄생하는 것 같이.
아주 긴 터널을 걷다 한줄기 빛에 시야가 일렁이듯이.
친구가 그려준 그림이 있었다.
이게 너야.
그림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차 아마도 끝이 아닐 계단을 중간 즈음 (간신히)
올라가고 있는 어떤 인간이 속을 게워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친구가 맞긴 맞는데, 그 그림은 꽤나 실질적이면서도 관념적이어서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 선물 같지도 않은 선물을 황망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게 지금의 나지. 씁쓸한 자조와 자기 합리화가 동시에 일어나 속은 엉망이 되었다.
지금의 나는 토해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고, 그것은 오롯이 내가 스스로 견뎌야 할 몫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억울하고, 외로워서 내 얘기 좀 들어주세요, 해도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내 안에 무엇인가가 상황과 사람과 그날 하루를 만나 어떤 화학작용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물을 자꾸 내뱉는다. 그것이 지금 현재의 나에게는 최선이라는 것을 누군가 알아줄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온 천하에 퍼즐 피스처럼 흩어져 있다. 나에게는 애당초 그것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엮을 능력 따윈 없었다. 나 또한 자연 너머의 강력한 존재가 예비한 한 조각의 퍼즐일 뿐인데 말이다.
며칠 전, 소수의 몇이 모여 농담 반 진담 반 논리를 논한 적이 있었더랬다. 각자의 입장이 나름 첨예했고, 나를 포함 목소리를 내던 중 한 분이 흥미로운 주제를 던졌다.
상대를 설득하려면 무엇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가.
로고스. 내용의 논리.
파토스. 청중의 감정.
에토스. 연사의 인격.
나는 무엇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일까?
누구에게?
내가 서있는 이 반경 안의 누군가에게?
서로의 존재감을 피부로 느낄 수없을 물리적인 거리가 존재하는 불특정 누군가에게?
그것도 아니라면, 나 자신에게 이게 너야,라고 설득하고 싶은 것일까?
비과학과 비논리의 최고치를 찍는 것 같은 나의 내면의 혼란이, 천천히 소원탑을 쌓듯 얼기설기일지라도 간절함을 담은 작은 축조물의 반석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나는 너무도 가련하고 비루하게 나 자신을 공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하지 않은 자그마한 하루를 퍼즐판의 제 위치에 놓고,
공감받을 수 없다면 먼저 공감하자.
그런 퍼즐 피스들이 점점 어떤 그림을 보여줄 만큼 축적될 때 나는 존재로서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모래를 뭉쳐 만든 굳건한 모래성 한 채가 밀물과 썰물에 쓸려 스러지듯이, 내가 그다지도 애써 만들어 놓고 자랑스럽다 생각하는 무언가도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그러나 그조차도 아름답지 않은가 말이다.
두렵다. 살면서 처음으로 너무나 두려운 감정과 긴장감이 엄습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은, 희망을 뜻한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는 상황을 '인식'하고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라고 했던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논리로써 발현시키기 전에 나는 이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해서 그 두려움을 조각조각 내어 소단위의 두려움과 차례차례 정면으로 맞서 보려고 한다.
나를, 그리고 세상을 설득해보자.
재미있는 싸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