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외국어, 요가, 헬스 등. 퇴근하고 할 일은 많았다. 십수 년을 공부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 무슨 공부를 하나 싶어 외국어는 뺐다. 또 십수 년을 공부만 해서 그런지 갑자기 무슨 운동인가 싶어 운동도 뺐다. 차 떼고 포 떼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뒤통수 뜨겁게 칼퇴하고 나왔는데, 뭐라도 해야지 않겠어?
글쓰기.
취업 준비 할 때였다. 이력서 100개 쓴다는 열정으로 매일밤 자기소개서를 썼었다. 뻔한 패턴이 지겨웠던 순간 눈에 들어온 채용 공고 'SBS 야심만만 구성작가 모집'. 방송 작가? 호기심이 생겼다. 야심만만은 당시 시청률 잘 나오는 예능프로그램으로 강호동이 메인 엠씨였다. 당시 약간 내리막이긴 했지만, 그래도 야심만만 아닌가?
나름 재미있게 봤던 프로에다가 '작가'라는 단어가 내 인생에 들어온 첫 순간이어서 그런지 운명처럼 느껴졌다. 간단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1장을 써서 무작정 제출했다. 이 모든 것을 다 하는데 30분도 안 걸렸다. (통상 기업 이력서는 최소 몇 시간 걸렸다.) 예능 프로니까 자기소개서를 딱딱하지 않게 적는다는 것이 그만 다소 오버한 것 같았다. 장난스럽게 쓴 것 같아서 후회됐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소개서 100장 중에 하나였다. 큰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9시 20분, 갑자기 전화가 왔다.
SBS 야심심만 작가님께서 면접을 보자고 하셨다. 뭐가 되려면 하루 만에 되는 건가? 나도 이제 강호동 보는 건가? 순간 엄청 떨렸다. 그러나, 전날 밤의 감흥이 되살아 나지는 않았다. 즉흥적으로 이력서를 낸 만큼이나 즉각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평범한 회사 가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이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 결국, 야심만만 면접에는 가지 않기로 했고, '작가'는 그렇게 잠시 왔다 간 추억 정도...
그 기억이 퇴근길에 떠 올랐다.
다시 마음속에 '작가'를 품었다. 회사보다는 호기심 생기는 일이었다. 칼퇴를 하고 글쓰기 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들여져서 그런지, 요즘은 뭐 하려면 일단 학원부터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글쓰기 학원이 있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