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하루 하루를 지나 어느덧 저는 어른이 되었어요.
정신은 초등학교 5학년인 채로 몸만 커버린 어른이요.
때가 되니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가졌어요.
이제 제가 누군가의 우주가 될 차례였어요. 겁이 났죠.
요리한다고 아이가 어질러놓은 집을 매일매일 치워야 하는 게 엄마잖아요.
아이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거 아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일 끝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야 하는 게 엄마잖아요.
할머니 댁에 맡겨놓아도 탈출해 버리는 예측 불가 개구쟁이를 키워야 하는 게 엄마잖아요.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게 엄마잖아요.
그걸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것뿐이겠어요? 저는 그와 동시에 경단녀.
어떻게 보면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던 상황이었잖아요.
걱정 말라고, 잘할 거라고 진심 어린 위로가 제 주변에 넘쳐흘렀지만 어리석은 저는 제대로 알아들을 정신조차 없었어요.
그 와중에 누군가 절 위로한다며 말했죠.
"잘된 거야. 애는 엄마가 끼고 키우는 게 최고야! 일 하면서 애 키우면 티가 나거든~"
맞아요. 그래야죠. 엄마가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죠. 일도 없으니 열심히 애 키워야겠죠. 딴에는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소리였겠죠.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온 그 말이, 저를 위로해 주려던 그 말이 매일 밤 제 마음을 후드려 팰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바로 우리 엄마가 '일 하면서 키운 애'였잖아요....
혹시 그때도 티가 그렇게 났을까요?
학교 지각 할 때부터 알아봤어. 너 집에 엄마 없었지?
늦게까지 동네에서 놀잖아. 너 집에 엄마 없어서 그렇잖아?
내복 입고 버스 탈 때 사람들이 다 알아봤어. 너 집에 엄마 없구나?
왜 이렇게 손이 더러워? 옷이 그게 뭐니? 엄마 어디 계시니? 아빤 안 계시니? 엄마 언제 오신대니? 너의 부모는 뭐 하는 사람이니?
내 딴에 애를 써왔던 그 무수한 과거의 시간들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죠.
티가 났겠죠. 아무렴 어른이 옆에 붙어 챙기는 것만 하겠어요. 그런데 어떤 티가 얼마나 났을까요? 그게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그렇게 하면 안 됐던 걸까요? 우리 엄마 정말 열심히 사셨는데? 그리고 우리도 나름 애썼는데...
엄마가 바쁘신 거 아니까, 저도 더 열심히 하려고 한 거거든요. 몇 번 굶기긴 했지만 동생 밥도 꽤 챙겼고요, 지각은 좀 했지만 12년 동안 결석은 한 번도 안 했고요, 늦게까지 놀긴 했지만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할아버지 과자를 좀 뺏어먹고, 할머니 집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들으면서 살았고요. 그리고... 그런 시선이 있다는 거 알아서 솔직히 더 열심히 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도 티가 났을까요?
얼마나 나이를 먹으면 이 느낌이 뭔지 알게 될까요?
그날이었어요.
제가 다시 초등학교 5학년으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고 다짐 한 날이요.
제가 어떤 시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제가 어떤 엄마가 되기로 결정했는지를 정리해 보고 싶었어요.
전 무엇이든 괜찮은 아이였거든요. 그래서 제 아이도 그렇게 키우기로 결심 했어요.
제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아이에게 어떤 티가 나든 나지 않든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 딱 하나 빼고는 무엇이든 괜찮아요.
나 때문에 우리 엄마가 아픈 거만 빼고 다 괜찮다는 말이에요.
이 이야기의 결말을 그렇게 지을 거라고 그때 이미 다짐했던 거예요.
그걸 이제야 살짝 말해 본거예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국민학교 5학년 우리 엄마딸이 여러분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