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 여주인공 안 하면 그만
"어머님, 지난 주말에 제게 너는 뭐 했냐고 따지신 것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저한테 뭐 섭섭한 거 있으세요?"
"내가?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몇 날 며칠을 덧칠 한 내 예상대본에 없는 대답이다.
"네, 그래서 애아빠도 당황해서 제가 이사 준비까지 다 했다 하니 어머님께서 웃으시며 얘네들이 쌍으로 덤빈다고까지 하셨잖아요."
"내가 그런 기억이 없는데. 아들이 잘 나간다는 얘기에 내가 왜 그런 얘길 하겠니?"
(제 말이요, 어머님) 아니, 정말 어디 아프신 건가? 처음엔 걱정했다.
"그냥 서운한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이중구속으로 저 희생양 그만 만드시고)
"없어, 그런 거 하나도 없어. 그렇잖아, 내가 아들 좋은 소식 들리는데 그런 말을 왜 하니.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그런 적 없어. 잊어버려라, 너도."
저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치매임에 틀림없다. 불과 이틀 전 일을 기억 못 하다니.
나는 남편에게 부리나케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알렸지만, 남편은 15년째 그녀에게만큼은 뭐든 관대해 아프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고, 그저 깜빡깜빡 잘도 잊으신다 생각했다.
남편을 뜯어고치는 건 역시 무리다. 자기 엄마가 내게 화를 내어 끝내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다행의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다고 하면, 난 너무 화가 난다. 편찮으시지 않다면, 나도 따져야겠다.
나는 목격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언어폭력을 하고도 발뺌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 한 마디를 못 들었고, 15년 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쳐 놓고 며느리라는 옷을 입혀놓고는 너 그 옷 함부로 못 벗잖아 하며 뜨거운 물을 연거푸 부어대며 매번 시시덕거리는 가정폭력의 피해자 같았다.
"나도 어머님께 알았다고 웃으며 전화를 끊어서 다시 화내는 건 참겠어. 대신 오빠가 어머님께 이전 사건도 있었는데, 다 큰 손주 있는 앞에서 며느리 무시하는 말 한마디 조심하셔야 한다고 단도리 해. 어머님께서 그러시겠다 하시면 이 일은 넘어갈 테니."
데인 상처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이유는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엄마, 기억 안 나세요? 엄마 상미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나 개한테 할 말 다 했어. 기억 안 난다니깐, 너까지 왜 그러냐?"
"기억 안 나다니 엄마. 손주 앞에서 앞으로 그런 말씀."
오랜만, 10년 만에 또 들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는 것도 진짜 능력이다. 스스로 세 번이나 남을 깎아내리며 자존감 바닥인 어른임을 증명하는 순간 되겠다. 그 집안 여자들에게 그들의 안하무인 방식에 순순히 순종하지 않는 나는 그저 '예민한 애'로 처음부터 치부되었다. 당신들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 덜 예민한 자기들이 정상이라는 전제를 깔고 보니 예민한 애는 늘 '비정상'이 될 수밖에.
매해 초등학교 친구들이 비정상이라며 놀려 대도 관심받고 있다 혼자 실실 대던, 그렇게 착각이라도 할 수 있는 그때로 순간 이동하고 싶다.
당신을 미치도록 싫어하게 된 건,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기 때문이다.
결혼하기 전, 회사에 있는 내게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놀랍게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주버님의 와이프, 형님이었다. 전화선 너머로 그녀의 떨림이 대번 느껴졌다.
"알고 계셨어요?"
"뭘요?"
"이 사람한테 호적에 올려진 아들이 있었다는 거요. 어쩐지 결혼하고도 혼인신고도 자꾸 늦추고 이상하다 했어요. 지금 어머님 뵙고 나왔는데, 저한테 왜 거짓말하셨냐고 눈물을 펑펑 쏟는데도 눈 깜짝 안 하시고 나는 모르는 일이니 네 신랑한테 가서 따지라고 그러시더라니까요! 대단하신 분이시니 상미 씨도 조심하세요."
순간, 얼음이 되었다. 이런 집안이었나. 신랑한테 확인하니 그 집안사람들은 나 빼고 이미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여러모로 사고 치고 다니셨던 아주버님의 첫 핏줄을 아버님께서 호적에 올리셨고, 형님께 결혼 전 다들 차마 말을 못 했단다.
사기결혼.
결혼식을 곧 앞두고 있는 나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당시 내게 마냥 친절하신 어머님이 고아인 형님에게는 무서운 게 없어 그러셨지만, 부모님이 계신 나에게는 그러시진 못할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와 시어머님과의 연을 다급히 막으려는 듯한 지극히 날 사랑하시는 신의 몸짓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결국 결혼식을 어그러뜨리는 잠깐의 세상 패배자가 두려워 신의 뻗은 손길을 뿌리치고 말았다.
14년 시어머니 막말 현장, 당신에 대한 이런 믿음이 있었음을 털어놨다. 나에게 언성을 높이며 내 잘못을 따지고 있을 때, 그녀는 뭐에 들킨 양 꽤 놀라했다. 내게 더 너그러움을 베풀어 달라는 내 뜻과는 달리 내 말이 사실인지 남편에게 1차 확인, 아주버님에게 2차 확인을 했다. 그리고 아주버님에게 사기결혼 당해 6년 전 떠난 전 형님에게도 3차 확인을 요청했다.
비상식적이다.
"그런 전화 한 적 없다는데, 개 어디서 거짓말이니?"
남편을 통해 들려온 말이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싶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니다. 그때 깨달았다. 그들과 합의점을 찾는 건 신의 영역이리라. 왜 자기 와이프를 거짓말쟁이로 모냐며 역정 한 번 내지 않은 신랑은 내 한이다.
막장 드라마 속 못된 시어머니를 욕하는 내 시어머님을 보며 그녀가 인지하지도 못한 나의 막장 드라마 속 여주인공 역을 이젠 그만두겠다고 다짐했다.
최근 내 경찰신고로 경찰서에 출두해 빼박 cctv를 확인하고서야 100프로 과실을 인정한 갑여사처럼 그녀에게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긍휼의 날이 단 하루라도 주어지길 신에게 기도한다.
세 번째로 끝을 외침에도 난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