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었다.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시멘트가 깔린 마당을 지나 알루미늄과 유리로 만들어진 현관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할아버지가 방문을 열며 말했다.
“춥다, 어여 들어와라”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흔의 할아버지, 그것도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집안을 청소하거나, 이불 빨래를 하거나, 환기를 하진 않았을 터이다.
나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얼굴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과 절을 한 뒤에 마루에 앉았다. ‘밥 먹어라, 과일이라도 먹어라’ 하는 할아버지의 말에 먹고 왔다고, 배부르다고 손사래를 쳤다. 엄마와 아빠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눴고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얼마 후 “가자”라는 아빠의 말에 “할아버지, 우리 가요”라는 짧은 인사를 하며 신발을 신었다.
우리는 차를 타러 가는 좁은 골목길에서 “우리 할아버지 진짜 정정하시다.
앞으로 10년은 거뜬하게 살 것 같아”라고 했다.
그게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한 달 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할아버지는 구급차에 실려 시내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두 달 후 어느 밤, 간호사 선생님의 전화로 아빠에게 걸려온 영상통화가 할아버지의 마지막이었다.
코로나는 할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게 했다.
할머니가 떠난 지 2년 반,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할머니는 치매였다. 5년 동안 병상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신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 우리는 할머니의 죽음을 늘 예견하며 살았다.
할머니의 장례식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다만 할머니의 손자 사랑에 밀린 손녀의 서운함과 서러움만 떠올랐을 뿐이다.
할아버지의 죽음도 그럴 줄 알았다. 사랑받지 못한 손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할머니의 지독한 손자 사랑에는 할아버지의 보탬도 있었다고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죽음은 그렇게 여기며 살았던 생각을 부수듯 다른 기억을 불러왔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 살던 할아버지는 배를 탔다.
동이 트기 전에 배에 오르고 해가 지기 전에 배에서 내렸다. 일곱 살이던가,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를 마중 가곤 했다.
할아버지 집에서 부두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꼬불꼬불 돌담 길을 지나 부두에 다다르면 배에서 내린 어른들이 가득했다.
그 틈에 할아버지가 보이면 우리는 “할아버지!!”라고 온 부두가 들썩이게 불렀다.
우리를 본 할아버지는 두 팔을 하늘 위로 크게 흔들었고, 우리는 힘껏 뛰어 할아버지에게 갔다.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후부터 혼자 아침을 맞이하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누워있었을 할아버지.
자식들이 가져다준 반찬이나 과일을 쓸쓸히 꺼내 드셨을 할아버지, 오랜만에 온 우리가 반가워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라던 할아버지, 오빠가 바꿔준 새 텔레비전을 업고 사신 할아버지.
보고 싶다, 좀 들리거라, 더 있다 가라는 말을 뱉지 못한 할아버지.
열아홉 앳된 얼굴로 등에는 총을 지어 해군으로 전쟁에 참전한 할아버지, 죽음의 순간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전장에서 살아남은 할아버지, 제대 후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바닷가를 뛰어다녔다는 할아버지, 나라를 구했다는 자부심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할아버지.
90년 세월을 걸어온 할아버지는 홀로 눈을 감았다.
사람이 생을 마감한다는 건, 누군가의 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웃어 보일 수 없고, 말을 건넬 수 없고, 밥숟가락 위에 반찬을 얹어줄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이 마지막인 줄 몰랐던 그날 이후, 내 호주머니에는 늘 후회가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