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솔직한 고민은 절대 적지 않을 것 같아서, 수업을 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이 활동은 무조건 익명으로 진행될 거야. 절대 자신의 이름을 쓰지 말도록! 고민 천사가 되어서 본 남의 고민을 함부로 이야기해서도 안되고, 선생님도 절대 읽어보지 않을 거야. 맹세. 진짜 하늘에 맹세! 선생님이 이거 보면 선생님도 아니다!"
그렇다. 나는 선생님이 아니다.
글씨체 보면서 필적 확인까지 다했다!
미안해 얘들아. 궁금한 걸 어쩌니?
말이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여하튼!
킬킬거리며 고민 쪽지를 몰래 읽다가, 눈에 하나 띈 고민이 있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저는 욕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고민입니다. 학교 밖이나 학원에서 친구들과 욕을 엄청 많이 합니다. 줄이려고도 해 봤지만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정말 놀랐다. 이 친구는 모범생... 아니 모범을 넘어, 친구관계나 성적 생활태도 모든 면에서 거의 퍼펙트해 아이들의 신임이 두터운 학생이었다. 우리 반 모든 학생이 쌍욕을 해도 왠지 이 학생만큼은 하지 않을 거라는 나의... 순진한 믿음이 완벽하게 깨진 순간이었다.
고학년의 언어는 참... 거시기하다. 좀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수학 문제를 풀다 어려운 문제가 나올 때 아이들은 '왜 이렇게 어렵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쌤, 저 그냥 자퇴할래요!"
후... 초등학교가 의무교육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사실, 이 정도만 돼도 그나마 교실에 붙어있는 담임이라는 존재를 아주 조금이라도 인식한 거고,
만약 내가 없는 곳이라면,
"3번 문제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오늘 자퇴 가즈즈아아아아~!! 한강 가즈즈아아아~~"
"수학 개.빡치네! 야 오늘 수학 학원 싹 다 폭파 각???"
뭐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이들 입장에서는 노력이 가상한 거다. 공적인 장소인 '학교'에서는 규칙이랍시고, 최대한 비속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니 말이다. 학교에서야 좀 낫지, 교문 밖만 나가 봐라! 이 세상 모든 부사를 '시발'과 '존나', 단 두 단어로 바꾸어 표현하는 '효율성 갑' 기적의 초딩들을 볼 수 있다.
대체 언제 어디서 배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까불던, 얌전하든 간에 예외는 없다. '천사 같은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와, '우리 담임 새끼 시발 존나 짜증 나.'를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초등학생이며, 진짜 무서운 것은 두 발언 모두 순수하게 진심이라는 거다.
그들의 몸속에는 항상 지킬과 하이드가 공존하기에-
이쯤 되니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 순수하던 아이들은 대체 언제부터 욕을 하기 시작했을까?
교사로서 이런 걸 적어도 되나 싶지만, 일단 내가 언제 욕을 처음 배웠는지는 정확히 기억난다. 또랑또랑했던 '말하는 강아지'시기를 지나, '완벽하게 이상적으로 칭찬만 받던' 시기도 지나, 나는 5학년이 되었다. 12살이 되자 아름다웠던 무지갯빛 세상의 회백색 뒷면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는데, 내가 세상 속 비속어들을 처음 배운 경로는 다음과 같다.
1. 영화
12살이 된 후 가장 큰 변화였다. 당시 나는 엄청난 영화광이었는데, 부모님 없이 친구들끼리만 12세 관람가 영상물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게 된 거다. (난 5학년 때 이미 키 160 가량의 우량아였기에, 만 12세가 되지 않아도 매표소 직원들을 별 의심 없이 날 들여보내 줬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나, 세상 강해 보이는 깡패들은 '시발 죽고 싶냐?'라던가 '존나 깝치네' 라던가, '재수 없는 새끼야'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들은 외모는 대개 훤칠하고 수려했으며, 따라서 굉장히 멋져 보였다.
나는 그 말들의 정확한 뜻은 알지 못한 채 '아 무엇인가 협박을 하거나 나를 과시하고 싶을 때, 강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구나.' 정도로만 추측한 채로 그 어휘들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2. 학원
5학년이 되자 해야 할 공부 양이 차츰 많아졌고 소위 '빡센'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당시 다니던 학원 중에서는 단어 시험을 많이 보기로 악명 높은 영어학원도 있었다. 그 학원에서는 매일 40개씩 시험을 봤고, 5개 이상 틀리면 개수대로 맞았다.
영어 학원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 오빠들도 꽤 많았다. 그 멋지고 까리한 선배들은(학교 다닐 때 1년 선배들이 얼마나 위대해 보이는지 상상해보라!), 외워야 할 단어가 많을 때마다 "아 오늘 숙제 시발 존나 많네!" , "단어 시험 X 같네"라고 말하며 정말 죽. 어. 라 공부했다. 영화에서 본 말들을 시니컬하게 내뱉으며 코피 터지도록 공부하는 선배라니!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이게 바로 존. 나 멋있다는 거구나!!'
이 스펀지와 같은 학습과 더불어 일어난 또 하나의 변화는, 왠지 모르게 스트레스받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이다. 안 풀리는 친구 관계, 성적에 대한 부담감, 점점 늘어가는 몸무게에 벅벅 꽃피던 여드름, 심각해지는 진로 고민까지....
이런 여러 복합적인 심리를 안고, 나는 우리 엄마의 두 눈알이 튀어나올만한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