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뜨자마자 괴롭다. 자, 일어나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짜 일어나자! 내가 그럴 리 없다. 타협을 한다. 할 수 있는 가장 큰 움직임을 시도해본다. 숨을 쉰다. 누워서. 절대 귀찮아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그런 거다. 후- 하- 후- 하- 숨을 아껴 쉬면서 남은 시간을 음미하는 거라고.
1초.. 2초.. 3초..
방학이 3일 하고 12시간 남았다.
4초.. 5초.. 6초...
아무도 없는데 그냥 울어버릴까?
이미 거진 사라져 버린 나의 방학을 추모해본다. 이번 여름방학은 유달리도 아름다운 놈이었다. 방학 중 실시하는 학교 보수 공사 덕분에 무려 60일이 넘는 기간을 자랑하는 눈부신 찬란함을 가진 녀석이었다. 보통의 여름방학이 30일 내외인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 말도 안 되게 긴 기간이다(덕분에 겨울 방학은 사라졌지만..). 한마디로, 이 정도면 그래. 정말 쉴 만큼 쉬었다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그 친구 덕분에 휴가도 즐기고, 공연도 준비했고, 글 작업도 마무리했고, (코로나도 걸렸고?), 오랜만에 가족도 만났다.
모두가 일터를 향하는 느지막한 아침에, 아무 목적 없이 혼자 여유롭게 누워있는 기분은 얼마나 끝내줬었는지! 추리닝을 대충 걸치고 들어온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타닥타닥 두드리며, 점심시간에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가는 바쁜 사람들을 호시탐탐 관찰하는 것도 즐겁다. 얄미워서 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말하건대, 아 진짜 끝내준다.
그러니깐 막... 막..살아있는 게 행복하고, 내가 1분 1초 살아 숨 쉬는 것이 생생한 기적처럼 느껴지는 그 기분,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꽃향기가 들락날락 거리는 기분. 귀에 최고급 스피커로 아이유 노래가 bgm으로 은은히 흘러나오는 느낌. 청명한 가을날 아침, 카페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원두 냄새. 초절정 꽃미남 삼만삼천 명이 나에게 동시에 데이트 신청을 하더라도 단언컨대 방학과 바꾸지 않으리라!
하지만, 안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그러니깐, 방학 첫날의 그 맛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뺏기기 직전의 기분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지는지까지도 안다는 것이다. 행복 총량의 법칙은..... 아마 인생의 진리를 담은 말이 아닐까? 방학 첫날 행복의 총량과, 개학 전날 불행의 총량을 더하면 아마 정확히 0이 될 거다.
달콤하게 한 조각, 또 한 조각 아껴먹던 초콜릿을 악마가 홱 뺏어버리는 기분이 이런 걸까? 아니면, 월급을 통째로 소매치기당한 기분? 장발장이 빵 한 조각을 훔치고 끌려갔던 노역장으로 향하는 낡아빠진 기차 안 공기.. 축 처진 삶은 양배추와 물렁하게 찐 당근을 갈아 만든 주스에 입을 대기 직전.... 산 꼭대기에 겨우 올려놓은 시지프스의 바위가 다시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 딱 1초 전 찰나.....
백가지 정도의 비유적 표현을 더 생각해 내고 싶지만, 시간이 아까우니 참아야지.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끔찍하고 가장 없어져야 할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개학이다. 개학. 개학. 개학. 지옥과의 동의어. 개학 정말 싫어. 너무 싫어. 진짜...세상에서 제일 싫어.
아니지! 긍정 에너지를 설파해야 할 교사로서 부정적인 생각은 접어두자. 방학 동안 놀기만 한 것도 아니잖아. 방학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학생'의 방학이지 '교사'의 방학은 아니지 않은가? 오전 출근과 수업만 사라졌던 거지, 공무원으로서의 업무는 변한 게 전혀 없었지 않은가? 업무용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재택근무가 계속 이어졌으며, 연수는 여전히 많았고, 중간중간 출근도 했으며, 2학기 수업준비도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으니, 개학을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다.
모든 일은 막상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다 별거 아니다.
출근만 하면 되는 거야. 그냥 출근만...
아 근데 인간은 왜 돈을 벌어야 살 수 있을까?
아 아니지.
애초에 왜 밥을 안 먹으면 굶어 죽는 걸까?
비루한 이 한 몸. 한 끼 식사 집어넣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없는 걸까?
아 이건 어떨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악마가 속삭이는 거야.
'뺨 한 대 맞으면 일주일 출근 안 해도 돼.'
그러면 나는 흥부가 되어 시뻘건 뺨따구를 자랑스레 내밀 텐데.
혈액순환을 위해 매주 뺨을 맞을 수도 있어.
아 나는 왜 하필 선생님이 되었지?
8살 때부터 나 학교 몇 년 다닌 거지?
60대까지 일하면 몇 년 남은 거지?
왜 개학은 해도 해도 적응이 안 되는 거지?
차라리 방학이 없었다면 이런 고통 따위 겪지 않아도 되는 건데!
애초에 왜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기계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나는 왜 태어난거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 순간만큼은 내가 드라마 속 비극의 주인공
이렇게 정신 나가서 괴로워하는 것 까지가 방학의 완성이다. 개학 후 일주일이면 체내의 비정상 호르몬들은 다행히 미치도록 바쁜 업무 덕에 제정신을 찾고 정상화된다. 방학 말 개학 증후군 역시 완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