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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멘탈 심리학자 Dec 27. 2023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괴로우면 우선 잠부터 자보자

잠을 소홀히 여긴 자의 반성문


밤에 잔다는 것은 나에게 참 어려운 일이다. 잠자리에 들면 두세 시간 뒤척이는 일이 보통이다. 너무 피곤해도 못 자고 너무 컨디션이 좋아도 못 자고 너무 행복해도 못 자고 너무 우울해도 못 잤다. 그냥 잠이 안 왔다. 참 지랄 맞게 예민한 존재인가 보다. 동틀 때까지 잠 못 들고 괴로움에 사무치다 환한 아침햇살을 뜬눈으로 맞이할 땐 기분이 정말 그지 같다. 이 거지 같은 기분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이 어려움은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 어린이 주제에 12시까지도 잠들지 못해 시계를 보며 불안에 떨었던 수많은 나날들이 떠오른다. 친구집에서 슬립오버를 할 때도, 캠프를 갔을 때도 나 혼자 못 자고 눈을 말똥 말똥 뜬 채 긴 밤을 보낸 기억도 떠오른다. 세계적인 신경 과학자이자 수면 전문가인 매슈 워커의 첫 번째 저서인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에 따르면 날 때부터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DNA가 있다고 한다. 먼 옛날 초기인류 시절 무리원들이 밤에 잘 때 안전하게 망을 봐주는 보초가 필요했다고 한다. 현시대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보초 DNA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와 씨. 내 조상은 일을 엄청 잘했나 봐. 가끔 나는 이렇게 밤에 잠 못 자는 DNA가 어떻게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너무 궁금했었는데 아 그랬구나.


이 문제는 학령기에 더 심해졌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지역은 부자 동네와 서민동네의 경계에 있었던 서민 동네였다. 그런데 운이 없어 부자 동네 학군지의 중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인 줄 알았는데 학군지의 상위권 애들은 고등까지 선행을 다 마치고 온 것이 아닌가. 지금이야 이런 선행학습이 특별한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선행학습이 없었던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어린 마음에 분했다! 나도 그런 사교육을 받았으면 더 잘했을 텐데! 그 벌어진 격차를 따라잡으려면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안 자고 2-3시까지 공부했었는데 그래도 십 등 안에 들기가 어렵더라. 이후에도 늦게까지 공부하는 습관이 그대로 쭉 이어졌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 목표했던 학위를 모두 마쳤지만 여전히 밤에 잠은 잘 못 잤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학생시절과 달리 틈틈이 쪽잠을 잘 수가 없어 늘 피곤했고 몸이 무겁고 여기저기 아팠다. 죽고 싶었다. 번아웃인가 싶었다. 그래서 병가도 내보고 잠시 휴직도 해봤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복직하면 같은 문제가 반복되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나이 들면 원래 다 아프다고 한다. 그것이 직장인의 디폴트라며 직장인이 어떻게 6시간 이상을 자냐며 나를 타박했다. 나는 매일 아프고 매일 우울했는데 정말 그 말이 맞나?


한국 학생 또는 직장인 치고 잠을 충분히 자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잠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게으름, 시간낭비가 먼저 떠오른다. 3-4시간만 자도 충분하다는 일 중독자들도 많다. 하지만 매슈워커박사에 따르면 유전적으로 그렇게 타고난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자신이 쇼트 슬리퍼라고 자신하고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말년을 추적해 보면 온갖 질병으로 힘든 노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3-4시간 수면으로도 충분하다는 사람들조차 7-8시간의 충분한 수면이 주어졌을 때의 퍼포먼스가 더 좋았다고 한다.

잠이 인생의 낭비가 아니라는 증거는 또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는 동안 몸이 움직이지 않아 몸이 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는 동안 몸은 가만히 있지만 뇌는 일을 하고 있다. 뇌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청소하고 재정비하고 충전하는 것이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수면 부족은 여러 질병들과 연관되어 있다. 감기와 우울, 불안 같은 가벼운 질병부터 당뇨병, 생명을 앗아가는 치매 암 심장마비 뇌졸중 같은 질환들이다.  또한 기억력을 강화하고 창의력을 높이고 기분의 질까지 관여한다. 한마디로 낮 동안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이러한 세세한 기능에 대해 정확히는 몰랐어도 중요하다는 사실 자체는 알았다. 하지만 내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경쟁에서 밀리기 싫어 자는 시간보다 내 목표가 더 중요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남는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갔다. 하루종일 잔뜩 긴장한 상태였는데 잠이 잘 올리가 있나. 이 생활을 몇십 년 반복하다 보니 결국 드러누웠다. 마지막 직장에서 1-2시간 자고 출근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몸이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운 좋게도 큰일이 터지기 바로 직전에 알아챘다. 아. 여기서 더 가다가는 신체 어느 부분을 내주던가 심하면 목숨을 내놓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스탑 했다.



그렇게 달라졌다. 이제 내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면이다. 이 중요한 것을 위해 필요한 의식을 치른다. 온도와 습도를 자는데 최적인 상태로 맞춰 놓는다. 자기 전 휴대폰, 티비, 형광등 불빛을 보지 않는 충분한 시간을 들이고 암막 커튼으로 완벽히 빛을 차단한다. 그리고 명상이나 호흡으로 몸에 힘을 빼는 연습을 한다. 머릿속으로 이런 상상도 한다. 5월의 산들바람이 부는 따사로운 오후에 맛있는 잠심을 먹고 소파에 누워 잔잔한 영화를 틀어놓고 즐기던 중 슬슬 잠이 오는 상상을 하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쉰다. 이렇게 노력해도 베개에 머리대면 바로 코 고는 우리 남편을 따라잡지 못한다. 역시 타고나는 게 최고다. 억울하지만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수면을 내 일상의 최우선으로 두고 노력하다 보니 조금씩 좋아졌다.


이렇게 밤에 지독하게 잠 못 들던 내가 그래도 나아졌던 시점은 마치 자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수면을 인생 목표 일 순위로 두고 나머지를 치워버렸던 때였다. 하지만 좋아졌다고 긴장을 놓으면 안 되나 보다. 지금도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밤에 못 자고 동틀 때까지 초롱초롱 깨 있는 날들을 종종 겪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뭐 어쩌겠나 이 거지 같은 유전자 같으니라고! 를 외치고 다시 자야지. 에휴.


물론 잠을 잘 잔다고 내가 겪는 대부분의 고민이 잘 해결되거나 일이 술술 풀린다는 말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어려운 일들을 계속 해결하는 여정인 것 같다. 그 여정 안에서 3-4시간 자고 일어난 나보다는 7-8시간 푹 자고 에너지 풀충전한 내가 나가서 해결하면 그 결과가 더 좋지 않겠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잠부터 자보자. 지금 당장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잘 자고 일어난 내일의 내가 해결하게 냅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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