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스피노자
고등학교 3교시 쉬는 시간. 우리는 서둘러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혈기왕성한 10대라서가 아니라 점심시간에 지하기도실에 내려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퀴퀴하고 어두운 회색 빛 지하기도실. 약 70명가량의 여고생들이 그 귀한 점심시간에 찬양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이 얼마나 신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인가? 성스러운 신성으로 하나가 되는 느낌, 그것은 존재의 충만함이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무엇이 나의 발길을 매일 그 앞으로 이끌었을까? 40대가 되어 나와 세상을 펼쳐서 읽어보기 시작하면서 마주한 질문이었다. 설교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한 것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 나에게 그런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어떤 전능하고 무한한 존재로부터 이해받고 위로받고 사랑받고 싶음이었다. 솔직히 그것 외에 다른 설명은 포장이다.
이런 연유로 오랜 시간 동안 당연히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은 모두 성경에 바탕을 둔 것들이었다. 내 삶에도 세계에 중심에도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그의 뜻대로 운행된다'는 것은 나에게 불변의 진리 그 자체였다.
어쩌다 '에티카'를 읽겠다고 다짐하고 펼쳐 들었지만, 그 안에 무슨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지는 몰랐다. 수많은 정의와 명제와 증명들. 고찰. 고찰. 고찰. 아아... 책을 쓴 스피노자도, 그 책을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읽는 나도 변태 같이만 느껴졌다. 이때부터 나의 '철학책 막 읽기'는 시작되었다.
그러면 유대인이자 랍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과 실체는 무엇일까? 그는 왜 에티카를 썼을까?
인간은 자기가 추구하는 이익과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 때문에 언제나 목적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목적원인을 찾아 알고자 했다. 그들의 곁에는 자연이 있었고 그것을 만든 전능한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상상에 자연은 신이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이고 신은 인간에게 숭배의 의무를 지게 하는 대신 모든 것을 누리게 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편견은 인간 자신들의 관점에서 해석되어 오랜 시간에 걸쳐 뿌리내기 되었다. 그리고 곧 여러 미신으로 변질되었다. (제1부 부록)
스피노자는 진리에 대한 이 편견을 깨트리고자 도형의 본질과 특성에만 관여하는 수학적 기하학으로 이 책을 집필한 것이다.
과연 세상은 실체인 신의 자유의지와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그것에 대한 스피노자의 답은 'No'이다. 목적원인은 인간의 상상 속 허구일 뿐, 자연에 정해진 목적이 없다. 만일 신이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면, 그것은 신이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채우려 함에 불과하다. 신은 완전자라는 명제가 흔들리는 셈이다. (제1부 부록)
신은 자유원인이다. 사람들도 그 명제를 의심치 않았으나 이유는 같지 않았다. 그들은 신이 절대적인 능력과 재량으로 세계에 관여하고 주재할 수 있기에 '자유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보기에 이것은 신이 삼각형의 본성에서 그것이 세 각의 합이 2 직각과 같다는 명제가 성립 안되게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 불합리하다고 논박한다. (정리 17 설명)
그가 증명한 '자유원인'의 이유는 신만이 전적으로 그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고 자신의 법칙에 의해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정리 17)
신은 유일한 실체이며 자유원인으로 완전하고 무한하다.
그가 정의한 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으로서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해서만 활동한다. 모든 자연은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결정되어 산출되고 모든 존재는 그의 본성이 변용된 양태로서 존재한다. 실체인 신과 그의 변용인 양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신은 나무에도 조약돌에도 딱새에게도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신이 초월자가 아니라니?
그가 말한 신은 내가 아는 그 신과 달랐다.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신이 아닌 신은 자연이자 법칙으로 어디에나 깃들어 있는 범신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신을 숭배해야 할 이유도, 자연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탐욕을 채울 합당한 이유도 사라지는 셈이다. 수직적 존재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창세기에 야훼는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려라!'라고 명한다. 정말 신의 뜻이었을까? 정말 자연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이것은 이제 다르게 읽힌다. 인간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함이다. 그것을 신의 뜻으로 가장해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하고자하는 욕망의 정당화. 그것 외에 달리 어떻게 불러야 하겠는가? 신을 믿으면서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사유하지 않음과 같다. 생의 긴 시간들을 맹목적으로 신의 말씀이라는 권위에 순종하며 살아왔다. 물론 어느 누가 강제함도 아니고 나의 의지와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제 나를 이끌었던 말씀이라는 별빛은 희미해져 간다. 다시 삶이라는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문자를 붙이고 앎을 이정표 삼아 나아갈 것이다. 렌즈를 세공하며 글을 썼던 스피노자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