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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로 살 것인가, 선한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

셔터 아일랜드와 전두엽 절제술

by sweet little kitty

셔터 아일랜드(Shutter Island)


개봉 2010.03.18

장르 드라마

감독 마틴 스콜세이지

원작 소설

출연 레오나르도 디 카프리오(테디 대니얼스), 마크 러팔로(척), 벤 킹슬리(닥터 존 코리), 에밀리 모티머(레이첼 솔란도), 미셸 윌리엄스(돌로리스)

러닝타임 138분


테디의 환상과 진실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섬 <셔터 아일랜드>에는 중증 정신 질환자를 수용하는 주립 정신병원이 있다. 주인공 테디 대니얼스는 미 연방 보안관(주로 범죄자 수배나 수감자 이송 등을 담당하는 법무부 소속 경찰)으로, 병원에서 탈출한 레이첼 솔란도를 수배하기 위해 동료 척과 함께 셔터 아일랜드 방문했다. 레이첼은 자녀 세 명을 죽인 존속 살해범이었다.


테디는 2차 대전에 참전하여 헨의 다하우 수용소에서 유태인들의 참상과 독일군의 마지막을 보았고,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을 자주 회상한다. 다하우 수용소는 히틀러가 처음으로 만든 유태인 수용소다. 테디에게는 또 하나의 아픈 기억이 있는데, 아내가 아파트 관리인 래디스의 방화로 화재 연기에 질식해 죽었다는 사실이다. 테디는 병원에서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자신의 아픈 기억을 계속 떠올린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상한 점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결국 테디가 그 병원의 조현병 환자였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진짜 이름은 그토록 증오했던 방화범 앤드류 래디스였고, 자녀 셋을 죽인 사람은 레이첼 솔란도가 아니라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던 테디의 아내였다. 테디는 이성을 잃고 아내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는 끔찍한 트라우마로 인해 기억을 왜곡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영화의 원작 소설에서 이 섬은 한때 해적들이 보물을 숨기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장소로, 그래서 ‘셔터 아일랜드(Shutter Island)’라 불렸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애너그램(철자 재배열)을 적용하면 ‘TRUTH and DENIALS(진실과 부정)’이 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현실 자아, 본능적 자아, 초자아가 서로 충돌할 때 불안이 생기며, 이때 인간은 방어기제를 사용한다고 본다. 견디기 힘든 기억이나 감정을 무의식 속으로 눌러두는 것은 억압이라 하고, 그것을 외부로 돌리는 것은 투사라고 한다. 테디가 자신이 아내를 죽인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연방 보안관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도 이러한 방어기제의 결과였다.


하지만 테디의 망상과 환각은 단순한 방어기제를 넘어 현실을 왜곡하는 조현병의 증상이다. 그는 심한 공격성을 보여 병원 직원들과 환자들에게 위협이 되었고, 의료진은 마지막으로 연극치료를 시도한 뒤, 호전이 없을 경우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전두엽 절제술, 치료인가, 억압인가


영화의 배경은 1954년이다. 주립병원의 코리 박사는 당시 정신의학계가 소위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약물치료와 같은 온건한 치료를 주장하는 학파와, 전두엽 절제술처럼 침습적이고 위험이 큰 공격적 치료법을 선호하는 학파 간의 대립을 뜻한다.


194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래디스처럼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와 전쟁으로 인한 뇌손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 틈을 타 월터 프리먼이 미국 전역을 돌며 전두엽 절제술을 시행했고, 그 결과 수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1954년에는 망상, 자살 사고, 심한 공격성을 보이는 조현병 환자에게 진정 효과가 있는 클로로프로마진(chlorpromazine)이 개발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정신질환에 효과적인 약물이 거의 없었기에, 정신의학계 내부에서는 치료 방향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척은 왜 시애틀 출신이라고 두 번 말했을까


영화의 첫 장면에서 테디는 후배 동료 척을 포틀랜드 출신으로 착각하고, 척은 자신이 시애틀 출신이라고 정정한다. 영화 중반에 이 대사가 다시 등장하는데, 시애틀과 포틀랜드는 모두 미국 서북부의 도시이지만 이 설정에는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다.


미국의 록밴드 **너바나(Nirvana)**의 노래 중에는 ‘Frances Farmer Will Have Her Revenge on Seattle(프란시스 파머는 시애틀에게 복수할 것이다)’라는 곡이 있다. 프란시스 파머(Frances Elena Farmer, 1913~1970)는 시애틀 출신으로 1940년대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던 여배우였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불안정한 양육 환경을 겪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신은 죽었다’라는 제목의 종교 비판 글로 상을 받았다. 워싱턴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으며, 대학 시절 연극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https://youtu.be/FYtSVzCOQms?list=RDFYtSVzCOQms


파머는 영화배우로 활동을 시작했다. 〈Too Many Parents〉(1936), 〈Come and Get It〉(1936) 등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흥행에 성공했지만, 파머는 감정 기복이 심하고 자기주장이 강해 종종 감독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단순한 성격 차원을 넘어 무면허 운전, 약물 사용, 폭음과 폭행 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처음 입원한 LA의 병원에서는 정신병 삽화를 동반한 양극성 장애로 진단받았고, 이후 킴볼 요양원에서는 편집성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데뷔 초반 파머는 뜻이 맞는 감독과는 순조롭게 작업했으며, 그들의 평도 좋았다. 그러나 자신이 싫어하는 감독과는 심하게 충돌했고, 폭음, 무면허 운전, 미용사 폭행, 약속된 일정 불이행 등 비정상적 행동을 반복했다. 급기야 법정에서 판사에게 잉크병을 던지는 등 법정모독 행위를 저질러, 감옥 대신 병원으로 보내졌다.


킴볼 요양원에서 파머는 인슐린 쇼크 요법과 얼음물 치료 등을 반복적으로 받았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고통을 호소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치료가 필요하다는 병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딸을 집으로 데려왔지만, 곧 파머의 공격적 언행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워싱턴의 웨스턴 주립병원(Western State Hospital)으로 옮겼다. 이 병원은 이후 파머에 대한 신체적·정신적 학대 논란으로 오랫동안 비판을 받게 된다.



좌)젊은 날의 청순했던 프란시스 파머 우)폭음과 폭행으로 법정에서 심리를 받던 중 폭력행위로 끌려 나가는 모습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현실판 셔터 아일랜드


파머가 웨스턴 주립 정신병원에서 겪었던 일들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더욱 조명되었다. 대필 자서전 『정말 아침이 올까요』에는 파머가 병원에서 성폭행과 신체적 학대를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전기 영화에서는 그녀가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 내용을 두고 언론과 주 정부 사이에 공방이 이어졌고, 파머의 가족은 “정신병원에서 전두엽 절제술을 권유받았지만 극구 반대했다”고만 밝혔다. 현재까지 의무 기록에는 수술을 시행한 명확한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퇴원 이후 파머의 인지·언어 능력이 비교적 보존되어 있었고, 여전히 감정 기복이 심한 행동을 보였던 점을 고려하면 전두엽 절제술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파머는 약 8년간 정신병원에서 지낸 끝에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 후에는 호텔에서 세탁물 분류 같은 단순 업무부터 시작해 회계·경리직에 취직하기도 했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 별거를 겪었다. 1957년부터는 TV 프로그램 진행자, 영화 단역 배우, 연극 배우로 복귀를 시도했다. 정신병원에서의 경험을 담담히 인터뷰하기도 했지만, 다시 폭음에 연루되며 예전처럼 연기를 이어가기는 어려웠다. 결국 화려했던 여배우는 1970년, 57세의 나이로 식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증상을 보면 사고장애보다는 기분장애, 특히 양극성 장애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활동기에는 잠을 거의 자지 않고 대본과 기획에 몰두했으며, 우울기에 접어들면 은둔과 무기력에 빠졌다. 자신에 대한 과도한 확신, 충동적 행동, 폭음과 비행을 반복한 점 또한 양극성 장애의 특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질환에 효과적인 약물인 리튬(lithium)이 1970년대 이후 상용화되었음을 감안하면, 파머는 생전에 적절한 약물치료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화려한 스타로 출발해 정신병원과 법정을 오간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었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은 진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많았던 파머의 전기 <섀도우랜드(Shadowland> 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녀에 관한 노래를 만들었다. 코베인은 파머가 전두엽 절제술을 받았다고 믿었으며, 그녀의 고향인 시애틀을 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해석했다. 마틴 스코세지 감독은 주치의 척이 바로 그 ‘시애틀’을 상징하는 억압의 공간, 즉 셔터 아일랜드에서 온 존재임을 암시하기 위해 같은 대사를 두 번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공격성은 과연 신의 선물일까


맥 머피는 미성년자 성추행을 저지른 반사회성 인격장애에 가까웠지만, 래디스(테디)는 살인 전과가 있는 조현병 환자였다. 조현병은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기 어려워지고, 망상, 환각, 와해된 언어, 감정 둔화, 사고의 혼란 등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원인으로는 도파민 전달체계의 이상, 전두엽과 변연계의 기능 문제, 그리고 다양한 환경적 요인이 제시되지만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영화는 그중에서도 망상, 환각, 공격적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의학적으로 조현병 환자에게 정신분석이나 연극치료를 통한 통찰은 어렵다. 조현병 치료의 핵심은 무엇보다 꾸준한 약물 복용이다. 규칙적인 약물 치료와 제도권 내 관리만으로도 방화나 살인 같은 극단적 범죄를 상당 부분 예방할 수 있다.


2019년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안인득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주민들 중 노약자와 여성을 골라 계단에서 흉기로 살해했다. 안인득은 앞서 2010년 행인을 상대로 흉기를 휘둘러 조사받는 과정에서 처음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이후 약 3년간 보호 관찰 대상이 되어 약물을 복용했고, 그 기간 동안은 큰 문제 없이 일상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나 2016년 중반부터 약물 복용을 스스로 중단했고, 2018년부터 망상과 공격성이 심해져 아파트 주민들이 경찰에 수차례 신고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그가 조현병 환자인지 확인하지 않았고, 병원으로 강제 이송하지도 않았다.


이는 2016년 개정된 정신건강복지법 이후, 병원과 보호자의 의지만으로 환자를 강제 입원시킬 수 없게 된 제도적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결국 제때 치료받지 못한 조현병 환자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Which would be worse, to live as a monster or to die as a good man?"

(괴물로 사는 것이 나을까, 선한 사람으로 죽는 게 나을까?)

자신만의 망상 속으로 돌아간 듯한 테디가 척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척은 전두엽 절제술을 준비하라는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던 중, 테디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 장면에 조금 앞서 되감기를 해 보면, 교도관이 차로 테디를 데리러 온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도관은 그는 “공격성은 신의 선물이며, 인간은 타고난 공격성 때문에 전쟁이나 살인을 저지른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괴물로 살 것인가, 선한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누구나 파괴적 충동과 공격성을 타고나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생의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한다. 만약 조현병을 타고난 공격성의 조절 실패로 본다면,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전두엽 절제술보다는 약물로 공격성을 조절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그것이 과학과 이성의 역할이다.


1954년의 테디에게 전두엽 절제술은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르지만, 2020년대의 조현병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약물 치료, 그리고 망상과 환청이 범죄로 이어지기 전에 입원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조현병 환자의 망상과 환각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곳곳에 흥미로운 복선이 숨어 있다. 테디의 회상 장면과 실제 사건을 비교하며 보면 또 다른 해석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흥행은 덜했지만, 사유의 깊이 면에서는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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